항목 ID | GC07500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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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百濟 |
영어공식명칭 | Baekj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이병호 |
[정의]
삼국 시대 한반도 중서부에 있던 고대국가 백제가 통치하던 시기의 전라북도 익산의 역사.
[개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에 부여족(扶餘族) 계통인 온조(溫祚)에 의해 오늘날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4세기 중반에는 북으로 황해도에서부터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일대를 영역으로 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백제 역사의 전개 과정은 수도의 변천에 따라 한성기[기원전 18~기원후 475년], 웅진기[475~538년], 사비기[538~660년]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백제는 세 차례 천도를 하면서 개성 있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한성기에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대규모 적석총(積石塚)에서 보듯이 고구려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나 웅진 및 사비로 천도하면서 중국 남조(南朝)의 영향을 받아 점차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 또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하고, 이것을 다시 신라나 가야, 왜 등지에 전해 주는 등 고대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성기와 웅진기의 익산]
익산 지역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 편입된 것은 한성기 말이나 웅진기 초로 생각된다. 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적이 익산 입점리 고분[사적 제347호]과 웅포리 고분군[전라북도 기념물 제98호]이며, 특히 횡혈식석실분과 그 출토품이다. 그중에서도 입점리 1호분은 궁륭상 천장을 한 석실분으로 백제의 횡혈식석실분 중에서도 가장 이른 단계에 속한다. 입점리 1호분의 축조 시기는 보통 5세기 후반으로 편년하고 있는데, 475년 한성기에 속하는지, 웅진기에 속하는지에 대하여서는 이견이 있다. 입점리 1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마구류[말재갈, 등자, 안금구, 행엽, 교구], 중국제 청자사이호, 철못, 꺾쇠, 토기류 등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다른 고분들에서는 토기류와 철기류 등만 소량 출토되어 입점리 1호분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입점리 1호분의 피장자가 이 지역에서 매우 우월한 존재였음을 잘 보여 준다.
입점리 1호분에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 화려하고 풍부한 부장품과 궁륭상 천장을 가진 백제 중앙의 묘제가 일찍부터 채택된 것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입점리 1호분의 피장자는 백제 중앙에 편입된 고위 관료이거나 백제 왕실에서 파견한 담로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익산 지역에서는 금강 하구 일대에서 비교적 이른 단계부터 횡혈식석실이 사용된 데 반하여 미륵산 일대의 내륙권역에서는 5세기 중반까지 마한 전통의 분구묘가 축조되는 등 지역적으로 약간 다른 전개 양상을 보이는데, 이를 마한의 전통이 그만큼 강고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비기의 익산]
익산이 백제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무왕 대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문헌 기록에는 무왕이 익산에서 자랐거나 익산이 무왕 어머니의 근거지였던 것으로 나온다. 익산은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익산은 무왕에게 인연이 깊은 곳이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세력 기반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백제 무광왕 때 지모밀지로 천도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무왕이 지모밀지, 즉 익산으로 실제 천도를 단행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630년(무왕 31) 2월에 무왕이 사비궁을 중수하면서 웅진성으로 갔다가 7월에 공사를 마친 후 다시 사비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이 시기까지 부여가 백제의 왕도였음을 보여 주는 반증이 된다.
하지만 익산에는 백제의 왕궁임을 알려주는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과 왕실 사원인 익산 제석사지[사적 제405호]와 익산 미륵사지[사적 제150호], 왕릉인 익산 쌍릉[사적 제87호], 방어시설인 익산토성[사적 제92호] 등 고대 도성이 갖추어야 할 주요 요소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특히 익산 왕궁리 유적은 한반도에서 확인된 거의 유일한 고대의 왕궁 유적으로, 장방형의 궁장 안에 다양한 전각과 정원, 공방 시설 등이 잘 남아 있다. 익산 미륵사지는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이 나란히 배치된 3원식 가람배치가 확인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는 사리봉영기를 비롯한 다양한 금속공예품들이 출토되어 백제인의 창의성과 문화적 성취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백제 무왕 대에 익산이 왕도로서의 위용을 갖춘 배경에는 부여로 들어가는 길목인 금강과 만경강을 이용한 수로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이점이 중시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