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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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益山土城 |
영어공식명칭 | Iksan Earthen Ramparts |
이칭/별칭 | 오금산성,보덕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산50-3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이문형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익산 토성 사적 제92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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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0년 - 익산 토성 성벽 발굴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4년 - 익산 토성 성벽 및 남문지 발굴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6년 - 익산 토성 시굴[성벽 및 평탄 지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6년~2018년[4차] - 익산 토성 평탄 지형 건물지, 성벽, 서문지 발굴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익산 토성 사적 재지정 |
현 소재지 | 익산 토성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산50-3 |
성격 | 성곽 |
양식 | 석성 |
관련 인물 | 안승 |
크기(높이,길이,둘레) | 690m[둘레] |
면적 | 26,400㎡ |
관리자 | 익산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에 있는 백제 시대 석성.
[개설]
익산 토성(益山土城)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에 있는 백제 시대 성곽이다. 흙으로 축성되었다고 알려져 토성이라고 이름 붙여졌으나, 4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석성으로 밝혀졌다.
오금산[해발 125m] 정상부와 남쪽 계곡을 두른 포곡식 산성으로 오금산에 있어 일명 ‘오금산성’ 혹은 ‘보덕성(報德城)’으로도 불린다. ‘보덕성’이라 칭한 이유는 금마면 일대의 옛 지명이 금마저(金馬渚)인데, 고구려의 멸망 후 신라에 투항한 안승(安勝)을 금마저에 두고 후에 ‘보덕왕’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이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익산군 고적조에 “보덕성은 군의 서쪽 1리[392m]에 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라고 하여 군의 서쪽 1리에 해당되는 익산 토성을 지목하여 왔다. 또한 불우조에서는 “오금사(五金寺)가 보덕성 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五金)을 얻었다.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 익산 토성을 보덕성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익산 토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9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익산 토성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산50-3번지에 있다. 오금산 정상부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서동이 어머니를 모시고 집을 짓고 살았다는 축실지를 비롯하여, 마룡지, 용샘, 오금사 등 백제 무왕의 탄생과 관련된 서동 생가터의 북쪽에 있다. 산성의 정상부 북쪽으로는 익산 미륵사지를 볼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국도1호선을 따라 멀리 전주 지역의 모악산까지, 동쪽으로는 완주 배매산까지 관망할 수 있다.
[형태]
익산 토성의 평면 형태는 마름모형에 가까운 형태이며, 해발 125m 오금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해발 120m 내외의 서남쪽 봉우리를 포함하여 남쪽의 곡간부 일부를 감싼 포곡식에 가까운 산성이다. 성곽의 둘레는 690m 내외이며 면적은 2만 6400㎡이다. 익산 토성의 구조는 성벽과 황의 이중적 구조를 하고 있는데, 성벽을 축조하고 전방의 자연 경사가 완만한 지역과 능선에 성벽 외곽으로 황(隍)[방어용 고랑]을 두른 후, 경사가 급한 지점에 교통로를 설치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금마도토성에서 확인되었다.
[현황]
익산 토성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1980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를 하여 성벽의 구조 일부와 남문지 등이 확인하였으며, 그 후 익산 토성에 대한 정비 방안을 목적으로 2016년 시굴 조사를 거쳐 2018년 4차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기존에 확인된 남문지 이외에 서문지가 새롭게 확인되었으며, 익산 토성은 토성(土城)이 아닌 석성(石城)임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1984년 발굴 조사와는 달리 백제 시대 축조된 이후에 통일신라 시대에 또 한 차례 개축된 서문지와 서쪽 성벽에서 석성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정상부의 평탄지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삼국 시대의 수혈건물지 상부에 후대의 주춧돌 건물지가 측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백제 시대의 인장와를 비롯하여 연화문, 파문 수막새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인근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수부(首府)’명 문자기와와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바 있는 ‘북사(北舍)’명 토기편이 출토되어 주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익산 토성은 과거 토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4차례 발굴 조사로 석성으로 확인되었으며, 성벽의 축조 기법에서 백제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왕실의 수도에서 출토된 바 있는 ‘수부’명 문자기와와 ‘북사’명 토기편이 출토되어 백제 무왕 시기의 왕궁리 유적과 함께 동일 시기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