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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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益山郎山山城 |
영어공식명칭 | Iksan Nangsan Mountain Fortress |
이칭/별칭 | 마한성,구성,북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산48 일원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규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3년 6월 23일 - 익산낭산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제13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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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 익산낭산산성 발굴 조사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익산낭산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재지정 |
현 소재지 | 익산낭산산성 -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산48 일원 |
성격 | 산성 |
양식 | 석성 |
크기(높이,길이,둘레) | 870m[둘레] |
면적 | 57,565㎡ |
관리자 | 익산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북도 기념물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에 있는 백제 시대 산성.
[개설]
익산낭산산성(益山郎山山城)은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해발 162m]의 정상부 정상과 8부 능선을 따라 축성된 산복식 산성이다. 마한성, 구성, 북성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남쪽은 미륵산이 가로막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삼면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동쪽으로는 높지 않은 산악 지대를 형성하고 있고, 당치산성과 천호산성이 보이며, 북쪽으로는 낮은 구릉 지대로 강경·논산·부여 등이 보이며, 서쪽으로는 낮은 구릉 지대와 평야, 그리고 함라산성과 금강 일부가 보인다.
익산낭산산성의 초축 관련 기사는 문헌에 보이지 않으며, 『익산군지(益山郡誌)』에 “마한성은 부(府)의 서쪽 15리 낭산 위에 있으며 석축으로 둘레는 1306척이고, 높이는 9척 여이다.”라고 하여 일명 ‘마한성(馬韓城)’이라 기록하고 있다. 마한성으로 불리게 된 연유는 후세에 와서 익산 일대가 마한의 구도(舊都)였다는 점에서 붙여진 것이라 전한다. 그리고 ‘구성(舊城)’ 혹은 ‘북성(北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구성이라는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산군조에 “낭산폐현에 토성의 고기(古基)가 있는데 주위는 3,900척이고 2개의 우물이 있다.”라고 기록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익산낭산산성은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익산낭산산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익산군지』에 ‘마한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옛 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2006년 발굴 조사를 통하여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태극문계수막새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초축 시기는 백제 시대로 볼 수 있다.
[위치]
익산낭산산성은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산48번지 일원에 있다. 익산낭산산성 앞으로는 금마에서 내산동을 거쳐 낭산·강경 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와 삼기에서 석불리를 거쳐 낭산·강경 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있으며, 서쪽으로 금강에서 함라산을 통과하여 금마 방면으로 오는 교통로와 논산에서 금마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에 있다.
[형태]
익산낭산산성은 산복식 산성으로 낭산의 정상과 8부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성벽의 구조는 성벽과 물을 채우지 않은 해자인 황(隍)을 시설한 이중 구조로 경사가 급한 남벽을 제외한 모든 구간에서 토축 및 해자의 흔적이 확인된다. 성의 둘레는 870m, 면적은 5만 7565㎡, 산성의 평면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석벽의 폭은 3~4.5m 정도이며 구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익산낭산산성의 시설은 남문지·북문지·동문지, 수구 2개소, 우물 1개소, 동남쪽 모서리에 건물지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2006년 전북문화재연구원이 남문지와 성벽 및 수구지 일부에 대하여 발굴 조사하였다. 익산낭산산성은 백제 시대에 초축된 이후 한 번 더 개축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성벽의 두께는 6m 내외 규모이며, 외환도의 폭은 대체적으로 3.5m 내외이다. 물이 없는 해자인 황(隍)은 주로 성곽의 남쪽 부분을 제외한 3면에서 확인되는데 지형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동쪽 성벽의 해자 폭은 3.3m 정도이며, 서쪽 성벽의 해자는 약 6.5m, 북문지 주변의 해자는 약 7.8m의 폭을 보여 동사면 해자의 폭이 좁은 편이다. 일부 필요한 지역에서는 벽체를 돌로 축조하였다.
남문지는 발굴 조사를 통하여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성문의 개구부 상부가 개방된 형태로 누마루를 올려 누문식 성문인 개거식(開拒式) 문지가 확인되었는데, 후대의 문지로 확인되었다. 초축과 관련된 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문지는 통로부에 문짝[門扉]을 이루는 문짝 기둥[門扉柱]을 끼우는 홈인 문지도리 홈[門樞, 門扉樞]이 있는 주춧돌 2매가 확인되었다. 통로부의 길이는 632㎝이고, 너비는 입구 쪽이 133㎝로 좁은 편이며, 출구부가 최대 359㎝로 출구 쪽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 형태이다. 통로부 바닥에는 잡석을 깔았으며, 입구부 경사도는 20~25°의 경사를 보이다 문지도리 홈이 있는 주춧돌부터 성안 쪽으로는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다. 문지도리 홈 간 거리는 230㎝이며 동쪽 문지도리 홈은 지름 17㎝, 깊이 13㎝이며, 평면은 원형이고 단면은 ‘∪’자 형이다. 문지도리 홈이 있는 주춧돌은 할석을 이용하여 적심을 1~2단 깔고 문지도리 홈이 있는 주춧돌을 올렸다. 서쪽 문지도리 홈은 지름 19㎝, 깊이 11㎝이며, 평면은 원형이고 단면은 ‘∪’자 형이다. 서쪽 문지도리 홈이 있는 주춧돌은 동쪽에 비하여 지대가 낮아 소형할석과 약 길이 100㎝, 너비 50㎝의 대형석재를 사용하여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문지도리 홈이 있는 주춧돌을 올렸다. 통로 성내부의 주춧돌은 20~30㎝의 할석을 이용한 적심을 1단 정도 부석한 후 길이 80㎝, 너비 70㎝의 윗부분이 편평하게 다듬은 주춧돌을 올렸으며 주춧돌간 거리는 300㎝이다. 남문지는 정면과 측면 길이가 약 300㎝인 문시설이 있었던 개거식 문지로 추정된다.
북문지와 동문지는 양쪽의 측벽이 서로 어긋난 형태로 진행되어 양측 측벽이 마주보지 않도록 튼 어긋문[重疊門]의 형태를 보인다. 북문지 통로부는 길이 약 8m, 너비 약 4.4m, 현재 높이 2.3m이며, 동문지는 통로부 길이 약 11m, 너비 약 3.2m, 현재 높이 약 2.5m 내외이다.
성벽은 남문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9m, 동쪽으로 6m까지 성벽 조사를 실시하였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생토층-적갈색사질점토층-선대성벽[백제]-후대성벽층[고려~조선] 순서로 축조되었는데, 성벽은 풍화암반층 위에 적갈색 사질점토를 성토하여 기초를 다진 후, 위로 성벽의 내외면을 모두 비등한 높이로 석벽(石壁)으로 구축한 협축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벽의 최대 높이는 4.25m이지만, 대체로 4~4.5m 정도이며, 폭은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4~5m 정도이다. 성벽의 내면·외면은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눕혀쌓기 하였으며 내부는 석재를 세로방향으로 조밀하게 채웠다.
그리고 수구대지 중앙부에 수구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수구대지 동단부에는 우물지가 남아 있다. 성내에서 성 밖으로 물을 내보내는 수구지는 남문지의 서쪽에서 2개소가 조사되었는데, 수구1은 출수구가 확인되었고, 수구2는 입수구만 확인되었다. 수구의 구조는 성벽 내부에 판상석재를 계단상으로 배치하여 바닥석을 마련하고 장방형 석재를 바닥석 양쪽에 세워 벽석을 세웠다. 벽석 위로 다시 판상석재를 이용하여 상석을 올렸는데, 입수구의 기초석 상면을 기준으로 높이는 100㎝, 너비 160㎝이고, 입수구 내부 크기는 높이 80㎝, 너비 70㎝이다. 발굴 조사 당시 확인된 수구1은 기초석으로부터 130㎝ 위쪽에 있으며, 출수구의 크기는 높이 55㎝, 너비 30㎝이며, 수구의 형태는 하단에 길이 50㎝, 너비 25㎝의 석재를 평적하고, 측면에는 길이 23㎝, 너비 18㎝의 석재를 2단 쌓은 뒤 상단에 길이 90㎝, 너비 22㎝의 편평한 판석을 평적하였다.
능선상에 형성된 평탄 대지에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평탄지 내부에서는 우물지 1곳이 확인되었다. 우물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에 가까우며 계곡부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자연스럽게 고이는 지형을 이용하여 석축으로 조성하였다.
[현황]
익산낭산산성은 2006년 남문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2019년 남성벽과 남문지만 확인할 수 있다.
[유물]
익산낭산산성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다양한 문양의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특히 유물 가운데 주목되는 연화태극문수막새로 남문지에서 1점, 수구지에서 2점 등 모두 3점이 출토되었다. 연화태극문수막새는 등기와가 결실되어 막새 부분만 남아 있다. 연판부의 문양은 중앙의 자방부(子房部)에 접하여 4엽의 연화문을 등간격으로 배치하였고 연화문의 선단부(先端部)쪽 2분의 1을 중첩하여 태극문을 반시계 방향으로 곡선을 그리며 돌아가는 형태이다. 태극문의 각 선단부는 서로 접하여 높은 양각선(陽刻線)을 주연부에서 약 1㎝ 정도 떨어진 채 돌렸다. 자방부는 연화문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데, 음각선(陰刻線) 1조를 돌려 자방부를 이루고 있다. 연화문의 선단부는 하트형의 아랫부분과 같이 길고 뾰족하게 처리하였으나, 연화문 자체는 볼륨이 거의 없다. 태극문은 소문(素紋)수막새에서 문양만 수직의 양각으로 높였고, 주연부(周緣部)는 내측면을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드림새와 등기와의 결합은 드림새를 얕게 깎고 등기와를 결합한 뒤 내면에 점토를 덧붙여 보강하였다. 태토는 석립이 혼입된 점토를 사용하였다. 색조는 회백색을 띠며, 소성 상태는 연질이다. 드림새는 지름 18.3㎝, 두께 1.1~1.3㎝이다.
연화태극문수막새는 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토성, 부소산성, 공산성 등에서 출토되었는데, 특히 익산 왕궁리 유적 출토품과 유사성이 높다. 그리고 ‘十’자명 명문암키와가 수구지에서 2점 출토되었는데 태토와 색조, 소성 상태로 보아 2점은 매우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등면에 양각으로 ‘十’자명이 뚜렷하게 찍혀 있으나, 조각난 상태로 출토되어 자체유무(字體有無)는 알 수 없는 상태이다. ‘十’자명 암키와는 익산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에서 출토 예가 있다. 제작 방법에 있어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에서 출토되는 동일한 형태의 백제계 기와로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백제로 편년될 수 있는 삼족기[세발달린토기]편, 개배[뚜껑접시]편, 기대[그릇받침]편, 단경호[짧은목항아리]편 등 토기편들이 상당량 출토되었으며, 기와류 가운데 선문계 기와는 주로 백제 시대 기와의 등면에서 확인되는 문양으로 선문의 길이가 짧고, 폭이 넓은 것들이다. 또한 제작 기법상 측면 문할흔, 내면 통쪽흔, 정선된 점토 등으로 보아 무문과 일부 격자문이 백제 시대 기와로 확인된다. 이들 기와들은 익산 왕궁리 유적과 익산 토성에서 출토된 기와와 유사한 기와로 볼 수 있다. 명문와 가운데 ‘입랑산산(入朗山山)’명 명문이 있는 수키와가 출토되었는데, 낭산은 백제 알야산현(閼也山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야산(野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낭산(朗山)’으로 지명이 변경된 것으로 보아 ‘입랑산산’명 명문와는 이 지역이 고려 시대에 낭산으로 바뀌었다는 기록과 서로 통하고 있어 고려 시대까지도 산성이 운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의 기와나 자기 등도 다수 확인된 것으로 보아 산성은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익산낭산산성은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2006년 발굴 조사를 통하여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태극문계수막새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초축 시기는 삼국 시대[백제]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