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1428 |
---|---|
한자 | 益山彌勒寺石浮屠 |
영어공식명칭 | Iksanmireuksaseokbudo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세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431년 - 김종직 출생 |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492년 - 김종직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497년 - 「익산미륵사석부도」 『점필재집』 21권에 수록 |
배경 지역 | 익산 미륵사지 석탑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
성격 | 한시 |
작가 | 김종직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김종직이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의 미륵사 석탑을 보고 지은 한시.
[개설]
「익산미륵사석부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익산 미륵사(彌勒寺) 경내에 세워진 웅장한 규모의 석탑을 보고 느낀 감상을 읊은 한시이다. 김종직은 1487년(성종 18)에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전주부윤으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에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를 방문하고 시를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종직의 호는 점필재(佔畢齋),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이며, 문집으로 『점필재집(佔畢齋集)』이 있다. 김종직은 절의와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조선 전기에 도학(道學)의 정통을 세우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성리학자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1454~1504]·정여창(鄭汝昌)[1450~1504]·김일손(金馹孫)[1464~1498] 등 당대의 걸출한 학자들이 배출되었으나, 김종직이 생전에 썼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무오사화(戊午士禍)[1498]의 발단이 되어 제자들과 여러 문인들이 큰 고초를 당하였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武王)[?~641] 때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용화산(龍華山)[342m] 아래에 창건된 절로서, 중원을 중심으로 동원과 서원을 배치하는 3원 구조이다. 중원에는 목탑을, 동원과 서원에는 각각 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중원의 목탑과 동원의 석탑은 완전히 유실되어 버렸고, 서원의 석탑만 창건 당시 형태가 남아 전하고 있다. 흔히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라고 하면 서원의 석탑을 의미하며, 서탑은 현전하는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구성]
「익산미륵사석부도」는 강(岡), 왕(王)을 운자로 쓰고 있는 칠언절구 형식의 시이다. 시의 앞부분에서는 용화산을 배경으로 하늘 높이 치솟은 석탑의 웅장한 규모에 감탄하고 있다. 뒷부분에서는 불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김종직의 도학자적 면모가 드러난다. 천여 년 동안 미륵사에 성리학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것은 ‘죄안(罪案)’에 오를 만하며, 미륵사를 세움으로써 죄안의 단초를 제공한 백제 무왕의 처지가 안타깝다고 말하고 있다.
[내용]
귀공민력경망망(鬼功民力竟茫茫)[귀신의 공력인지 사람의 힘인지 아득하기도 하여]
상질용화만인강(上軼龍華萬仞岡)[용화산 만 길 산등성이 위로 치솟아 올랐네]
천재석재성죄안(千載石材成罪案)[천년 세월 석재가 죄안을 이루었으니]
가련금마무강왕(可憐金馬武康王)[가련하구나 금마 땅 무강왕이여]
[의의와 평가]
「익산미륵사석부도」는 조선 초기 미륵사의 존재와 규모에 대하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한시이다. 또한 15세기 정통 성리학자인 김종직의 불교에 대한 인식의 단면을 보여 주는 시이기도 하다. 김종직이 익산과 관련하여서 지은 「익산에서 두 수를 읊으며[益山二首]」라는 시와 함께 『점필재집』 21권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