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377
한자 井谷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정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정곡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73년 7월 1일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정곡리에서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면 정곡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9년 5월 1일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면 정곡리에서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정곡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9.66㎢
가구수 104가구
인구[남/여] 187명[남자 100명, 여자 87명]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정곡리(井谷里)는 깊은 골짜기에 큰 우물이 있으므로 우무실 또는 정곡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 말 진안군 일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광주동(光珠洞)·개곡리(開谷里)를 병합하여 정곡리라 하고 부귀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진안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 진안면이 읍으로 승격되며 진안읍 정곡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정곡리진안읍의 13개 법정리 가운데 깊은 산중에 위치한 지역이다. 정곡리의 마을들은 진안읍의 주산인 부귀산을 등지고 입지해 있어 주변에는 산골짜기와 고대들이 발달해 있다. 부귀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의 북쪽으로 부귀면 수항리·거석리·오룡리와 접경하고, 다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의 서쪽으로 부귀면 신정리와 접경하고, 동쪽으로 뻗어내려 광주동 골짜기와 연장 저수지를 거쳐 광산재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의 남쪽으로 진안읍 연장리와 접경하고, 부귀산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의 동쪽으로 진안읍 군상리·군하리·단양리와 접경한다.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인 가운데 정곡·광주동은 남쪽 연장리 쪽으로 트여 있고, 개실·활인동은 서쪽 연장리 쪽으로 트여 있다. 부귀산에서 발원해 흐르는 정곡천정곡리 마을의 논과 밭에 농수를 공급하고 서쪽으로 흐르다가 신정천과 합수해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골짜기가 좁아 들판이 부족한 편이다.

[현황]

정곡리진안읍의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2013년 11월 30일 현재 면적은 9.66㎢이며, 인구는 104가구 187명[남자 100명, 여자 87명]이 살고 있다. 활인동·개실·정주[광주동·정곡]의 3개 행정리가 있다.

주요 경제 활동은 농업으로 고추·인삼·벼를 주로 경작하고 있다. 이밖에 고추와 수박·열무·감자를 하우스에서 재배하는 농가도 있으며, 자두·복숭아·사과 등의 과실수 재배 농가도 있다. 활인동 마을에는 제제소·정비 공장·주유소·양계장 등 축산업과 상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국도 26호선이 남쪽 활인동을 지나 강경골재를 넘어 진안읍으로 연결되고, 정주·개실 등의 마을은 군도와 마을도로 연결된다. 유물과 유적으로는 정주 마을 어귀에 있는 수원 백씨 효자비·인동 장씨 효열비·돌탑·광주동 마을 숲 등이 있다.

개활곡(開活谷)은 개실과 활인동의 행정리명으로, 개가 새끼 세 마리를 품고 다른 짐승이 두려워 엎드리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개실은 본래 개곡(開谷)이라 하여 골짜기를 의미한다. 진안군 내에서 유일하게 금(金)이 채굴된 마을이다.

개실 마을 당산제는 1980년대에 없어졌는데, 본래 세 군데에서 모셨다. 첫 번째는 마을 앞의 숲, 다음은 마을 앞 다리에 있었던 돌탑, 마지막으로 마을 뒤 샘에서 지냈다. 제일은 섣달 그믐날 어두워지면 초저녁 무렵에 지냈다. 제일 며칠 전부터 풍물을 가다듬고 준비를 하는데, 제주는 나이가 많고 점잖은 사람이 맡는다.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비용은 풍물을 치면서 집집마다 추렴한 돈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읍내 장에서 돼지 머리·삼색 실과·떡·술 등을 준비하며 제사에는 제주와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한다.

마을 뒷산에는 산제당이 있는데 산신제는 1990년경 끊겼다. 산제당은 바위가 있는 곳을 말하며, 여느 마을굿과 마찬가지로 동네 회의에서 부정을 타지 않은 사람으로 제관을 정하고, 풍물을 치면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비용을 추렴하여 삼색실과 등 제물을 장만하여 제를 지냈다. 제를 잘못 지내면 예전에는 호랑이가 마을로 내려와서 개나 돼지를 물어갔다고 전한다.

당산제는 마을 왼쪽에 상당히 큰 느티나무에서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지낸다. 당산나무에 금줄을 치는데, 이 때 오색 천과 한지에 쌀·수수·팥·콩 등을 싸서 걸어 놓는다. 집집마다 쌀을 추렴하여 비용으로 사용하며 제물로 떡·팥죽·쌀 등을 준비하였고, 부정을 타지 않은 사람으로 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가운데 제를 모신다.

무제는 마을 뒷산인 부귀산 산날망에서 모셨다. 이 때 돼지를 잡아 피를 뿌렸다. 부녀자들은 유망 마지기라고 불리는 곳에서 챙이로 물싸움을 하면서 비오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광주동 탑은 마을 숲에 위치한다. 돌탑을 직사각형으로 쌓았으며, 위에는 콘크리트로 판판하게 해 놓고, 그 윗부분에 윗선돌 대신에 문관석을 올려놓았다. 문관석을 올려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돌탑은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했다. 1990년경까지만 해도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에 아주머니들이 중심이 되어 제를 지냈다.

마을 입구에 참나무와 아카시아 나무로 구성된 마을 숲이 있다. 이는 수구막이로 이곳이 터지면 마을이 좋지 않다고 하여 잘 보존하고 있다.

활인동(活人洞)은 강경골재 너머에 있는 마을로 임중화(林中花) 또는 연화도수(蓮花到水)의 명당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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