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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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機 |
이칭/별칭 | 미숙(微淑),유산처사(乳山處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동희 |
거주|이주지 | 김기 은둔지 - 전라북도 진안 부귀면(富貴面) 오룡리(五龍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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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인|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사천(泗川) |
대표 관직|경력 | 의금부 도사 |
[정의]
조선 전기 진안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미숙(微淑), 호는 유산처사(乳山處士). 평장사(平章事) 민의공(敏懿公) 김사의(金思灑)의 손자이고 병조 판서 오매당(寤寐堂) 김만서(金晩緖)의 아들이다. 김만서는 서울 출신으로 처부가 영의정 황보인이다.
김만서는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장인 황보인과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자 사직한 후 전주(全州)로 내려갔으며, 1456년(세조 2)에 사육신이 처형당하자 진안군 부귀면 오룡리에 은둔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진안에 세거하였다.
[활동 사항]
김기(金機)[?~?]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3세 때 아버지를 따라 점필재 문하에서 8년을 수학하였다. 성종 때 학행으로 추천되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만년에는 진안의 동쪽 유산(乳山)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남은 삶을 강호(江湖)에서 마쳤다. 사헌(司憲) 노사신(盧思愼)이 제문을 지어 그를 이르기를, ‘세가(世家)에서 태어나 점필재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은거하여 일생을 고고하게 살았다.’고 하였다.
[상훈과 추모]
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었다. 판서 이명적(李明迪)이 지은 행장(行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