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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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夜學 |
이칭/별칭 | 야학교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인탁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근현대 시기 야간에 운영한 비정규적 교육.
[개설]
호남 지역은 의병 전쟁의 중심지로 일본군이 남긴 심각한 후유증과 맞물려 자강 운동이 부진한 지역적인 여건에서 교육 활동은 전반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는 상황 속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야학 운동은 개항장과 행정 중심 도시를 기점으로 전개되었다. 전라북도 진안 지역 역시 지역 유지와 교사·학생을 중심으로 야학이 설립·운영되면서 지역의 계몽과 근대 교육 보급에 노력하였다.
[야학 설립]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야학은 1914년 진안군으로 합병된 용담 서면 유지들이 1909년 주양(朱陽) 야학교를 설립한 후 노동자 40여 명을 모집하여 가르쳤다. 이를 계기로 인근 괴정과 성암 등 5~6개 동 유지들도 각각 야학교를 설립하여 야학마다 20~30명에 달할 정도로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또한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최초의 근대 학교인 1907년 진안 향교에 세워진 진안 문명 학교 내에도 1909년부터 야학 강습과 농민 야학과가 운영되었고, 1910년에는 하기 강습소가 운영되었다. 하지만 진안 야학의 지역 계몽과 근대 교육 보급 및 최근 평생 교육의 활성화에 대한 노력으로 현재 진안 지역에서의 야학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야학 운동에 나타난 지역 운동사적 특성]
전라북도 진안 지역 역시 다른 지방과 공통적인 현상 중 하나인 지방 관리의 적극적인 참여와 후원 그리고 초등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교과 과정 특성을 들 수 있다. 야학 운동이 주도 세력 관심 여하에 따라 성패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과 사립 학교령 시행으로 사립 학교들이 설립된 지 2~3년 만에 폐교되는 상황에서 야학 운동은 근대 교육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항일 운동으로서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 계몽 활동과 보교 과정으로 운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