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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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潭縣居昌劉氏古文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선아 |
작성 시기/일시 | 1744년 - 「용담현 거창 유씨 고문서」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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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진안 역사박물관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내사양길 7[단양리 813] |
성격 | 문헌|고문서 |
관련 인물 | 유수휘 등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 역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용담현 거창 유씨 고문서.
[개설]
진안 역사 박물관 소장 「용담현 거창 유씨 고문서」는 진안 용담군 남면 여의곡(如意谷)에 살던 거창 유씨가 작성한 1744년부터 1887년까지 작성한 29장의 호구 단자 및 준호구이다.
[제작 발급 경위]
호구 단자란 호주(戶主)가 각 개인의 호구 상황을 작성하여 관청에 제출하는 문서로 오늘의 호적 신고서이다. 조선 시대에는 매 3년마다 호적을 작성했는데, 호주는 자신의 가족 상황과 변동 유무를 단자(單子)로 만들어 2부씩 해당 관청에 제출한다. 그러면 관청에서 확인인을 찍어준다.
호적 대장이 만들어지면 관에서는 이를 증빙하는 의미에서 혹은 이런저런 요구에 의해 호적 대장의 기록을 다시 등사하여 주었는데, 이를 준호구라고 하였다. 준호구란 호적 대장에 근거하여 관에서 발급한 것이니 오늘날의 주민 혹은 호적 등본과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형태]
호구 단자와 준호구는 호적을 증명하기 위해 개인과 관청이 서로 주고받는 문서이지만 그 형식 면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호구 단자는 별행인 반면에 준호구는 계속 이어 기록된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단자의 첫머리는 면단위 이하의 거주지명과 호구 단자[혹은 호적 단자]라고 표기되지만, 준호구에서는 발급 연도와 관청에 이어 근거가 된 호적의 식년이 기재된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용담현 거창 유씨 고문서」는 전체 29건의 고문서중 호구 단자는 20건, 준호구는 9건이며, 그 내용과 발급 시기 및 크기는 다음 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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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내용]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군 남면 여의곡(如意谷)에 사는 충의위 분무공신(奮武功臣) 통덕랑 유수휘(劉秀輝) 가문의 9대에 걸쳐 작성된 호구 단자 20건과 준호구 9건이다. 유수휘 가문에서 나온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744년에 작성한 준호구이다. 분무공신이란 1728년에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오명항 등 열다섯 사람에게 내린 공신이다. 유수휘의 본관은 성주이고 아버지는 유인걸(劉仁傑), 조부는 유의흥(劉義興), 증조는 유줄용(劉乼龍)이고, 외조는 정선업(程先業)이었다. 처는 최씨로 당시 나이 46세였으며 본관은 경주이다.
유수휘의 아들 유은삼(劉殷三)이 1771년에 발급받은 준호구, 유기삼(劉基三)이 33세[1775], 59세[1801], 62세[1804]에 발급받은 준호구, 유기삼의 아들 유명신(劉命臣)이 34세[1795], 43세[1804]에 발급받은 준호구, 유명신의 아들 유원종(劉元宗)이 30세[1816], 유한종(劉漢宗)이 36세[1819]에 작성한 준호구 등이다.
호구 단자는 1821년 유한종이 작성한 것으로 당시 유한종은 아버지 명신, 조부 기삼, 증조 통덕랑 수휘이고 외조부는 별제 고세달(高世達)이다. 부인 우씨(禹氏)는 당시 35세였고 동생 유원종(劉元宗)은 28세였으며 13세 된 동생과 같이 살고 있었다. 또 다른 호구 단자는 유명신의 아들 유홍규의 것으로 당시 36세였다. 이밖에 유홍구의 아들 유천일(劉千一)의 호구 단자 및 유홍구의 손자 유관열(劉寬烈)의 호구 단자 등이다.
[의의와 평가]
「용담현 거창 유씨 고문서」는 진안군 용담현 여의곡에 살았던 유수희의 가문 9대에 걸쳐 있는 호구 단자 및 준호구이다. 유씨 집안은 최초 준호구를 발급받고 있는 유수희가 1728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이 있어 분무공신으로 책봉되었으나 이후 별다른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 다만 본 고문서는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무신난’ 혹은 ‘이인좌의 난’과 관련된 진안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