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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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潭縣南原梁氏古文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선아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에 있는 진안 역사 박물관 소장 남원 양씨 고문서.
[개설]
진안 역사 박물관 소장 「용담현 남원 양씨 고문서」는 용담현 남원 양씨 종중에서 1777년부터 1903년까지 작성된 41장의 호구 단자와 준호구, 그리고 신호적이다.
[제작 발급 경위]
호구 단자란 호주(戶主)가 각 개인의 호구 상황을 작성하여 관청에 제출하는 문서로 오늘의 호적 신고서이다. 조선 시대에는 매 3년마다 호적을 작성했는데, 호주는 자신의 가족 상황과 변동 유무를 단자(單子)로 만들어 2부씩 해당 관청에 제출한다. 그러면 관청에서 확인인을 찍어준다.
호적 대장이 만들어지면 관에서는 이를 증빙하는 의미에서 혹은 이런저런 요구에 의해 호적 대장의 기록을 다시 등사하여 주었는데, 이를 준호구라고 하였다. 준호구란 호적 대장에 근거하여 관에서 발급한 것이니 오늘날의 주민 혹은 호적 등본과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형태]
호구 단자와 준호구는 호적을 증명하기 위해 개인과 관청이 서로 주고받는 문서이지만 그 형식 면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호구 단자는 별행인 반면에 준호구는 계속 이어 기록된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단자의 첫머리는 면단위 이하의 거주지명과 호구 단자[혹은 호적 단자]라고 표기되지만, 준호구에서는 발급 연도와 관청에 이어 근거가 된 호적의 식년이 기재된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진안 역사 박물관 소장 「용담현 남원 양씨 고문서」는 전체 29건으로 이 중 13개의 호구 단자와 15건의 준호구, 그리고 공신자소세계 단자 1건이며, 그 전체의 발급 시기와 크기는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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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내용]
진안 역사 박물관 소장 「용담현 남원 양씨 고문서」는 용담현 이동면 상적도리(上赤道里)에 살고 있던 남원 양씨의 후손가에서 작성·발급받은 호구 단자와 준호구, 그리고 신호적이다.
「용담현 남원 양씨 고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777년 용담현에서 양중창(梁重昌)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이 준호구에 따르면 용담현 이동면 상적도리에 살고 있는 좌리공신(佐理功臣) 충의(忠義) 양중창에게 발급한 것이다. 좌리공신은 조선 시대 28번의 공신 책봉 중에서 성종 조인 1471년(성종 2) 3월에 왕을 잘 보필했다는 공으로 봉해진 공신으로 당시 1등에 신숙주와 한명회 등이 책봉되었고, 3등에 양성지 등이 책봉되었다. 용담현 남원 양씨는 좌리공신 양성지의 후손 중 일족이 용담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양중창의 직역은 충의(忠義)이다. 충의는 공신의 자손으로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된 사람이다. 따라서 1780년에 양덕주[31세]가 발급받은 준호구에도 ‘충의’로 기록되고 있다. 1783년에 양의주(梁義柱)[24세]가 발급받은 준호구, 1795년에 양원제(梁元堤)[74세]가 발급받은 준호구, 1798년[가경 3]에 양인주(梁仁柱)[43세]가 발급받은 준호구 등이다. 이외에 다수의 호적표가 있다. 양문수(梁文洙)가 57세, 59세, 62세[1907년] 때 작성된 것이고, 양배수(梁裵洙)[48세, 1894], 양은수(梁殷洙)[37세, 1882년], 양기수(梁基洙)[58세, 1879년] 등의 호적표가 있다.
[의의와 평가]
용담현 이동면 상적도리는 남원 양씨의 집성촌이다. 진안 지역에서 생산된 고문서류는 많지 않지만 세거지를 이루고 있는 집성촌에서 한 집안의 가계를 알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