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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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鎭川中山里戰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중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제우 |
성격 | 대북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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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50년 7월 6일 |
종결연도/일시 | 1950년 7월 7일 |
발생(시작)장소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중산리 |
관련인물/단체 | 수도사단 제1연대|제6사단 제19연대 |
[정의]
1950년 7월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중산리에서 일어난 전투.
[역사적 배경]
6·25전쟁을 도발한 북한군 주력부대는 6월 27일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하여 7월 3일 한강 방어선을 뚫고, 경부국도를 따라 남진하는 한편 경부국도 동쪽으로는 북한군 제2사단이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를 밀어제치고 이천, 장호원, 진천을 향하여 남진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의 이른바 제3차 침공계획을 보면, 중부 서쪽의 아군을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서 포착하고 북한군 제2사단을 중앙으로 하여 진천-청주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중서부로 전선을 양단한 다음 여세를 몰아 대전 침공 때 좌익으로부터 압박하려 하였다.
한미연합전선의 형성 결과에 따라 미지상군이 평택-안성에서, 국군이 차령산맥에서 방어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경부국도를 동쪽으로부터 위협하는 북한군 제2사단을 진천-청주에서 방어함으로써 그들이 대전으로 침공하려던 기도를 분쇄하는 동시에 군의 전선 정제를 위한 시간적 여유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광혜원-이월-진천 국도의 장악을 놓고 피차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진천 중산리 전투가 최초의 접전이 되었다.
[경과]
최현(崔賢)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2사단은 서울에 설치한 전선사령관 김책(金策) 등의 독전(督戰)으로 밤낮 구분 없이 전차 20대를 앞세우고 죽산으로 향하였으며, 7월 6일에는 제6사단 제19연대를 뒤쫓으면서 이월면 중산리 부근까지 남진하였다. 그들은 서쪽으로 중산리 서쪽 2.5㎞에 있는 옥녀봉부터 동쪽으로 중산리 동쪽 1.7㎞ 신월리 사이에 전개하였다.
이 무렵 진천군 서쪽의 이권무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4사단은 천안을, 진천군 동쪽의 박성철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15사단은 음성을 목표로 각각 남침하였다. 당시 적 제2사단 병력은 12,000명, 전차 10대, 자주포 12대, 122㎜ 곡사포 26문, 76㎜ 곡사포 13문, 45㎜ 대전차포 43문, 120㎜ 박격포 12문이었다.
그들의 전력 면에서는 초기 전 때만 하여도 산악전까지 마친 수준급 사단으로 평가되었으나 남침하는 동안 1/3 이상의 고찰이 손실되고 또 춘천에서 패전 책임으로 사단장 이청송이 최현과 바뀌었다. 그리고 전쟁에 급급한 지도층의 발악으로 상하가 공포 분위기에 쌓이고 보급마저 아군의 공습으로 끊기다시피 하여 현지 약탈로 연명해야 할 상태였던 까닭에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한편 신설한 국군 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7월 5일 18시에 수도사단장 이준식 준장의 예하 제8·18연대를 진천으로 이동케 하였는데 평택에 집결한 중에도 제1연대 예하 병력이 온존하고 있는 제1대대에 집중적으로 병력과 장비를 보충한 다음 차량 20대로 진천을 향하여 선발시키고 잔여 병력은 부연대장 김황목 소령이 열차편으로 뒤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제8·18연대와 사단 제1포병단의 제2포병 중대는 뒤이어 따르게 하였다. 뒤에 도착한 병력을 포함하여 사단 총병력은 7,855명 규모이고 중요 장비는 105㎜ 곡사포 16문, 81㎜ 박격포 16문, 60㎜ 박격포 27문, cal50 19정이었다.
7월 6일 18시에 제6사단 제19연대는 적의 제2사단의 압박으로 중산리까지 물러나 있었다. 이에 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수도사단은 급거 진천 북쪽으로 진출하여 제19연대를 수용한 다음 이를 통합 지휘하여 남침 중인 적을 저지하라고 하달하는 한편 그 자신도 청주를 향해 직행하였다.
전날인 7월 5일에 사단장으로 부임한 이준식 준장은 부대를 파악할 여유도 없이 진천으로 달려가 때마침 이곳으로 진출 중인 제1연대장 이희권 중령으로 하여금 진천 북쪽으로 약진토록 한 다음 제8·18연대를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 무렵, 양 연대는 조치원 쪽으로부터 도보 또는 차량 행군으로 청주로 향하여 이동 중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면한 사단장은 피아의 능력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의 우려는 첫째, 병력의 집중에 있어서 선제공격의 이익을 얻지 못하였다는 점과, 둘째는 병력과 화력에 있어서 적이 월등히 우세하다는 점, 그리고 셋째는 진천 부근은 표고 100㎜ 내외의 야산과 넓은 벌판으로 현시점에서 볼 때에 방어하기에는 불리하다는 점 등이었다.
즉 이준식 사단장은 잃어가고 있는 전장의 주도권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잠시 동안 진천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한이 있더라도 양호한 고지를 점령하여 병력의 집중과 사기의 회복을 기하였다가 일거에 적을 포위 섬멸하기로 결심하고 다음과 같은 구두 명령을 하달하였다.
첫째, 사단은 적을 진천에서 격파하려 한다. 둘째, 1연대는 진천에서 적을 저지 분쇄하고 명에 의하여 수차 지연전을 실시하라. 셋째, 제8연대는 지체 없이 봉화산을 점령하고 공격할 태세를 갖추라. 넷째, 제18연대는 지체 없이 문안산을 점령하고 공격할 태세를 갖추라. 이와 동시에 그는 사단 전방 지휘소를 진천 서남쪽 5㎞ 역리에 개설하였다.
7월 6일 3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에 진천 북쪽으로 약진하는 수도사단 제1연대의 선봉 중대는 접적(接敵)을 유지하면서 이곳으로 철수하던 제19연대의 후위 중대를 수용하였다. 10시에 진천에 진입한 제1연대장 이희권 중령은 예하 제1중대 대장 장태환 소령에게 1개 중대를 진천 북쪽으로 약진시켜 지연전을 하고 있는 제19연대의 중대와 합세하여 급편진지를 점령, 적의 침공을 저지 격파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대대장은 곧 제1중대를 급파하였다.
이리하여 동중대는 진천읍을 빠져나갔는데 이때 인적도 없는 읍내 우체국에서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중대장 윤흥정 중위가 잠시 행군 대열에서 벗어나 수화기를 들었더니 “우리가 진천을 해방하러 곧 들어갈 터이니 환영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윤흥정 중위는 “이놈아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어, 두말 말고 귀순이나 하라!”라고 욕을 퍼붓고 전화를 끊었다.
급행군으로 중산리에 이른 중대는 제19연대 후위 중대와 합세한 다음 585도로[지금의 국도 17호선]를 중심으로 하여 동지 바로 남쪽에서 서쪽으로 낮은 능선에 이르기까지 급편진지를 마련하고 개인 호(壕)를 파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적은 마치 양 중대의 고착(固着)을 털어 버리려는 듯이 포격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위력은 세차지 못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들의 탐색대로 보이는 1개 소대 규모가 전방 진지까지 침투하여 산발적으로 사격하기도 하였으나 그들은 양 중대의 잠복조(潜伏組)에 의하여 쫓겨났다. 이러한 가운데 중대장 윤흥정 중위는 적의 거동을 감시하기 위하여 낮은 고지로 올라가 송림리 쪽을 조망한 바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모여 있음을 목격하고 대대에 이 상황을 보고하는 한편 양 중대에 적정을 알리고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하였다.
한편 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청주 지구로 전진, 적의 상황이 사실상 막연하였는데 사단장 이준식 준장으로부터 “송림리 부근에 수미상의 군사를 동반한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집결 중에 있다.”는 보고에 접하자 비로소 이천으로부터 제19연대를 쫓아 남하하던 군대호미상(軍隊號未詳)의 1개 사단 규모가 나타날 것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도사단만으로는 진천을 지탱하기에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육군본부에 병력 증원을 요구하였다. 조치원에서 청주로 행군 중이던 제17연대를 군단에 배속하는 한편 독립기갑연대 장갑 제1중대 및 동 연대 도보대대, 그리고 신설한 제1포병단에서 1개 중대를 각각 증원하였다. 그러나 이 부대들은 배속 명령을 받고 비로소 조치원 및 대전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전투 배치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과]
7월 7일은 아침부터 쾌청하며 피아 양군은 진천을 중심으로 한 병력의 집중과 이를 저지할 진용(陣容)의 강화를 서로 다투었다. 진천읍에서 북쪽으로 8㎞ 떨어진 송림리에 개미 떼같이 모여 있는 적은 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북한군 제2사단 예하 제6연대이며 이들은 이날 14시 포병 지원 밑에 585도로와 양측으로 전개하여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중산리 남쪽 능선을 끼고 있던 제1연대 제1중대 및 제19연대의 후위 중대인 양 중대는 적의 포격으로 산병호(散兵壕) 속에서 제대로 응전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전차와 포에 힘을 얻었음인지 행군 대열로 바꾸고 전차도 동반하지 않은 채 남하하고 있었다. 낮은 고지에서 이를 지켜보던 중대장 윤흥정 중위는 그 선두가 가까운 거리에 이르렀을 때 사격을 명령하여 맹공격을 하니 불의의 기습을 받은 적은 중산리 북쪽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양 중대의 위치가 폭로되면서 그들은 병력을 양분하여 일군은 도로변을 따라 직진하는 한편 다른 일군은 미호천(美湖川) 상류의 속칭 되마루[송림리 동남쪽 2㎞]에서 동안(東岸)을 따라 우회하여 중대의 동쪽을 강타하기 시작하였다. 양 중대장은 이 같은 상황을 예측하였으나 박격포 하나 없는 형편으로 우회하는 적을 견제하지 못하고 소화기 사격으로 접근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진천 중산리 전투는 막을 내렸다.
[의의와 평가]
진천 중산리 전투는 적이 파죽지세로 남진함으로써 진천과 그 남방의 봉화산과 문안산을 먼저 점령하여 한반도 중부 지방, 특히 대전을 공략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려던 기도를 분쇄하였을 뿐 아니라 남진을 지연 저지시켜 아군이 봉화산-문안산 전선에서 전열을 가다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