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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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時發 |
영어음역 | I Sibal |
이칭/별칭 | 양구(養久),벽오(碧梧),후영어은(後潁漁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호수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후영어은(後潁漁隱). 고조할아버지는 이원(李黿)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발(李渤)이며, 할아버지는 이경윤(李憬胤), 아버지는 진사 오촌(梧村) 이대건(李大建)이다.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김도(金燾)의 딸이다. 부인은 여흥민씨이고, 아들로 이분이 있다. 이대건과 이시발 부자의 호에 똑같이 ‘오’(梧)자가 들어 있는 것은 그들이 살던 오근리(梧根里)와의 연고 때문이다.
[활동사항]
이시발(李時發)[1569~1626]은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현재의 청원군 오창읍 장대리]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성장하면서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9년(선조 22)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청천의 산곡(山谷)으로 피신시킨 후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박춘무(朴春茂)의 휘하에 들어가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이듬해 서울이 수복된 이후에는 환도를 주저하고 있는 행재소에 나아가 서울을 되찾았으므로 빨리 돌아와 민심을 수습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장병과 군비를 정돈하여 왜적을 완전히 격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승정원도승지 심희수(沈喜壽)가 이시발의 시국 판단과 문장에 감탄하고 선조에게 품신하여 환도하게 하였다.
또한 병조판서로 있던 이항복(李恒福)도 이시발의 재지책략(才智策略)에 감탄하여 1593년(선조 26) 가을 왕에게 품신하여 경주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접반관(接伴官)으로 삼아서 병법을 배우게 하였다. 이때 낙상지도 이시발의 재능을 칭송하여 매사를 상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시발은 병법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언어와 정세 및 예규(禮規)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또한 낙상지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선조에게 이시발을 추천하여 크게 기용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후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세자시강원사서를 역임하였다. 1594년(선조 27) 병조좌랑에 재직 중 강화 교섭의 임무를 맡은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해 정탐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승진해 순무어사(巡撫御史)를 겸하여 호서 지방을 안무하였다.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현재의 부여]에서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난이 평정된 뒤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였는데, 그의 명성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책동이 있어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왔다. 그러나 곧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부름을 받아 종사관으로 나아갔다. 이해 겨울에는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충주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또 조령에 방책(防柵)을 설치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분조(分朝)[임진왜란 당시 세자 광해군이 있던 임시 조정을 부른 이름. 선조가 있던 의주 행재소는 원조정] 호조참의가 되어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 보급을 관장하였다. 뒤이어 경상도순찰사가 되었는데 시기하는 무리가 있어 물러나 성주목사를 거쳐 경주부윤이 되었다. 경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고 생업을 안정시킨 치적이 뛰어나 1601년(선조 34)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4년간이나 재임하였다.
1604년(선조 37) 형조참판 내직으로 돌아왔다가 북변(北邊)의 경계가 필요한 상황을 맞아 이듬해 함경도관찰사에 추천되었다. 함경도에 나아가 진보(鎭堡)와 포루(砲樓), 성곽을 수축하고 모두 새롭게 정비한 후 그해 가을에 다시 예조와 병조의 참판 내직으로 돌아왔다. 1608년(광해군 1) 서북변(西北邊)의 여진족이 침입하자 다시 평안감사로 나아가 진무(鎭撫)하였다.
1609년(광해군 2) 명나라에서 책봉사를 파견하자 명나라와 교빙사정(交聘事情)에 밝은 이시발이 어전통사(御前通事)[어전통역관]로 불려가 다시 내직에 나갔으며, 관군국제무(管軍國諸務)를 거쳐 병조판서겸주사대장에 임명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역옥(逆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석방되었으나 관직은 삭탈되었다.
1614년(광해군 6) 다시 기용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했다가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자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1618년(광해군 10) 파주목사에 일시 기용되었다가 폐모론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을 탄핵하자 또다시 벼슬을 버리고 청주 화양동으로 들어가 정자를 짓고 한거하면서 ‘후영어은’이라 자호(自號)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명나라에서 파병을 요청하자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아 군사를 보냈는데, 때마침 체찰사 장만(張晩)이 안주에서 병을 얻어 누운 관계로 특명으로 오도참획사(五道參畫使)에 임명되어 장만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평안도에 이르러 수십 개의 진영(鎭營)을 설치하고 공부(貢賦)를 비롯한 민폐를 크게 고쳤으며, 둔전(屯田)을 설치해 군량을 충족하게 하였다.
이때 외척인 옥강만호(玉江萬戶) 변일(邊溢)이 청나라 군사 100여 기를 보고는 성을 버리고 도망간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시발이 변일을 잡아 처형하여 군기를 바로잡으려고 하였는데, 광해군이 크게 노해 그에게 책임을 묻자 신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수국유사당상(修局有司堂上)으로 지의금부사겸지춘추관사에 임명되어 북방의 외침에 대비한 연병책(練兵策)을 실시하게 하였다. 뒤이어 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난의 수습에 공을 세웠다.
이후 청나라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그에 대비하여 강화도의 군비 시설을 강화하였으며, 다시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삼남 지방의 군비를 정비하였다. 뒤이어 남한산성을 수축하였는데, 그 역사(役事)를 감독하다가 1626년 향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시발은 문신이면서도 임진왜란 이후 국방·군사 분야에 상당한 업적을 쌓은 장신형(將臣形) 전략가이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벽오유고(碧梧遺稿)』가 있으며, 군사 관계 저술인 『주변록(籌邊錄)』이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지전마을의 경주이씨 묘역에 있다. 1610년 3월 이시발은 돌아가신 부친의 묘소를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 벌영산에서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로 직접 이장하고, 그해 4월에 진천 초평으로 살 집을 마련하여 가족들을 이주시켰다.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경주이씨 묘역은 이시발이 세상을 떠난 몇 해 후 이시발의 아들 이분에 의해 두 번째로 이장한 곳이다. 이시발의 묘도 1626년 이시발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에는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의 선영 아래 장례를 치렀으나 1658년 아들 이분이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현 위치로 이장한 것이다. 그 뒤 자손들이 이곳에서 번성함에 따라 그 일족에게 초평이씨(草坪李氏)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58년(효종 9) 예조참판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을 호조참판 송준길(宋浚吉)이 행서로 쓰고, 승정원좌승지 이정영(李正英)이 두전(頭篆)한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진천 이시발 신도비는 현재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192-11번지에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