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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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聖龜 |
영어음역 | Chae Seonggu |
이칭/별칭 | 용구(用九),지비재(知非齋),지비자(知非子),충헌(忠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호수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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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 |
성별 | 남 |
생년 | 1605년 |
몰년 | 1647년 |
본관 | 평강(平康) |
대표관직 | 영월군수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용구(用九), 호는 지비재(知非齋) 또는 지비자(知非子). 증조할아버지는 채흥선(蔡興先)이고, 할아버지는 채정간(蔡廷侃)이다. 아버지는 진사 채진형(蔡震亨)이며, 어머니는 김몽정(金夢禎)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아버지 채진형이 우거한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용몽리 몽촌마을이 가문의 근거지이다.
[활동사항]
채성구(蔡聖龜)[1605~1647]는 지금의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에서 태어났다. 1630년(인조 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성균관학록·성균관학정·성균관박사를 거쳐 사헌부감찰·형조좌랑·사헌부정언·사헌부지평·예조정랑·영월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모두 화친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인조를 위문하고 율시를 지어 척화를 주장하였는데, “차라리 북지왕 유심(劉諶)이 되어 죽을지언정 동창의 적신(賊臣) 진회처럼 목숨을 구하지는 않겠다[寧為北地王諶死 不作同窓賊桧生]”라는 구절로 유명하다. 이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살다가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아버지 채진형의 문집인 『순당집(蓴塘集)』에 채성구의 시문이 수록되어 전한다.
[상훈과 추모]
1755년(영조 31) 채성구의 존주절의(尊周節義)의 행적이 높이 평가되어 이조판서겸대제학에 증직되었으며, 충헌(忠憲)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