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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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重洽 |
이칭/별칭 | 벽암(碧岩)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수암부락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양식 |
성격 | 문학가|시인|소설가|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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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수암부락 |
성별 | 남 |
생년 | 1908년 |
몰년 | 1985년 |
본관 | 양주 |
대표경력 | 북한 평양문학대학장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의 문학가.
[개설]
조중흡(趙重洽)은 본관은 양주(陽州)이다. 본명이 중흡이고 호가 벽암(碧岩)이나, 조벽암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1908년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수암부락[숫말]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소설가·평론가이다. 조태희(趙兌熙)와 평산신씨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인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의 조카이다. 한집에서 태어나고 같이 성장한 두 문인은 1920년대와 1930년대를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살면서 한국문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
[활동사항]
조중흡은 무관 출신의 선조들의 영향을 받아 강한 배일(排日) 정신을 갖고 있었다. 진천보통학교를 다닌 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면서 문학의 열정에 눈뜨게 되었다. 온 집안 식구들의 반대로 법학을 전공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동경 유학에서 귀국한 숙부 조명희의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대학 재학 중인 1931년 소설 「건식(健植)의 길」을 『조선일보』[8. 1~8. 21]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들어섰다. 두 달 후 10월에는 『조선중앙일보』에 대표작 「향수」를 비롯한 9편의 시를 연속으로 발표하여 탄탄한 문학의 기틀을 보여주었다. 조중흡의 이런 기초는 물론 조명희의 영향뿐 아니라 조명희와 같이 기거했던 민촌(民村) 이기영(李箕永)으로부터 소설을, 정지용(鄭芝溶)으로부터 시를 배울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비롯되었음을 자신의 회고에서 말하고 있다.
1933년 이무영·임가순·이홉 등과 『문학타임즈』를 간행하였으며, 박팔양·박태원 등과 구인회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조중흡은 당시 권위 있는 문학지인 『조선문학』의 1933년 11월 문예좌담회에서 속기록을 맡기도 하고, 영동의 시인 흑성 권구현(權九玄)에 의해 1934년도에 가장 기대되는 작가로 꼽히기도 하였던 당시 문단의 신진 세력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38년 시집 『향수』를 발간한 뒤 친일 문인이 늘어나자 해방이 될 때까지 절필하여 항일 의지를 보였다.
1945년 해방 이후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면서 1947년 시집 『지열(地熱)』을 펴냈다. 또한 건설출판사를 설립하여 주보 『건설』을 발행하였고, 『정지용 시집』, 『낙동강』을 비롯한 많은 문학·철학 서적을 출간하였다. 그는 화산상회의 부산, 목포지점 등을 떠돌며, 농민들뿐만 아니라 수탈당하는 어민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를 시화한 것이 「바다의 여인」으로 1948년 중학교 5~6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던 작품이다.
또한 임화·김남천·이태준·한설야·이기영 등이 참석하였던 봉황각좌담회에서 기록 자격으로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문학단체의 핵심에 서 있던 조중흡은 1946년 8월 10일 조선문학가동맹 서울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해방 기념시집 『횃불』과 『3·1 기념시집』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조중흡은 1949년에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시집 『벽암 시선』을 발간하고, 『문예총 기관지』 편집,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조선문학』 주필, 평양문학대학장, 『문학신문』 주필 등을 역임하였다. 1985년 11월 24일 조중흡의 사망 소식이 한국의 일간지에 보도되었고, 1988년 그의 작품이 해금되어 햇빛을 보고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저술 및 작품]
벽암 조중흡의 작품 활동은 1930년대 초에 시작되었는데, 시와 소설을 거의 동시에 병행하면서 발표하였다. 시 작품으로 「새 아침」·「만추사경(晩秋四景)」·「새 설계도(設計圖)」·「봄」 등을 발표하였고, 시집으로 『향수』와 『지열(地熱)』을 간행하였다. 「빈집」은 1933년 12월 7일 『동아일보』에 「만추삼제」라는 연작시로 「허수아비」·「철쭉」과 함께 발표되었는데, 이 시는 당시 황폐화된 농촌의 실상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 농민시의 전형이다. 「씀바귀」는 1930년대 시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조중흡의 시는 지식인의 비참한 현실과, 지식인이 현실에서 느끼는 우수와 권태와 비통과 증오의 감상을 서사적·설명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중흡의 소설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난다. 「건식의 길」·「구인몽희열」·「농군」·「처녀촌」·「파종」·「취직과 양(羊)」 등은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인물들의 사회적 투쟁을 다루거나 동물에 빗대어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그에 반해 「결혼 전후」·「노승(老僧)」·「파행기(跛行記)」 등에서는 당대 현실의 문제를 진지하게 적용하지만, 정치적 이념을 내세우기보다는 도덕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당시 프로 문학의 관념성과 도식성을 개인의 양심과 문학적 기법으로 일정하게 넘어서고 있다. 역서로는 막심 고리키의 『문학론』(1947)이 있다. 월북 이후에는 「싸우는 제주도」·「떼 비둘기 날을 때까지」·「동궁 앞에서」 등의 시를 썼다.
[상훈과 추모]
1994년 『동양일보』와 충북문인협회에서 진천읍 벽암리 생가 터에 표지석을 건립하였다. 2004년에는 『조벽암 시전집』이 발간되었고, 2008년 탄생 100주년 작가기념 세미나와 특별전이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