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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079
한자 李琰
영어음역 Yi Yeom
이칭/별칭 옥오(玉吾),운당(雲塘)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편세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선비
성별
생년 1538년연표보기
몰년 1588년연표보기
본관 고성(固城)
옥오(玉吾)
운당(雲塘)
제향 정강서원(鼎岡書院)

[정의]

조선 전기의 선비.

[생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옥오(玉吾), 호는 운당(雲塘). 기국이 웅위(雄威)하고 용모가 수려하였다. 어릴 때부터 도량이 커서 『소학(小學)』과 사서(四書)를 힘써 공부하여 유학에 정통하였다. 특히『대학(大學)』의 「성의(誠意)」편을 몸소 실천하여 체득하려 노력하였으며, 실제로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부모를 섬김과 형제를 사랑하는 데 도(道)를 다하였다.

부모의 상중에 있을 때는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따라 친히 스스로 음식을 가려서 그 정결함을 극진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바쳤다. 또 여러 아우들을 대할 때는 그 우애를 극진히 하였으니 아우 두 명이 모두 등창을 앓을 때에 항상 그 고름을 빨아주고 그 아픔이 자신의 몸에 있는 것과 같이 하였다. 또한 친구들과 사귈 때도 도의를 지키면서 의리 있게 행동하였다. 평소에 최영경(崔永慶)·하항(河沆)·유종지(柳宗智) 등 동인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활동사항]

1550년(명종 5)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를 중흥시켜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부활하고, 승려 보우(普雨)를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에 임명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8세 때에는 삼각산에 들어가 독서를 하는 중에 문정왕후가 그 사찰에 100필(疋)의 금단(錦緞)을 내려 기복을 하였는데, 그 비단을 모두 불태워 왕후의 노여움을 사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나, 명종의 두둔을 받고 형을 면하게 된 일이 있었다.

[상훈과 추모]

진주의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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