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0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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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新女子高等普通學校 |
영어의미역 | Ilsin Girls' Higher Normal School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88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판근 |
성격 | 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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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881 |
설립연도/일시 | 1925년 |
설립자 | 허만정 외 10인 |
[정의]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진주시 지역에 있었던 여자 교육 기관.
[설립경위]
1919년 3·1운동 이후 진주군 지수면의 재력가 허준(許駿)이 교육만이 우리 민족이 살길이라고 생각하여 진주지역에 남자 중등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유지들의 뜻을 모아 진주일신고등보통학교(晋州一新高等普通學校)의 인가를 받았다.(현재 진주고등학교 자리, 상봉동 987번지) 그러나 일제가 민족자본으로 만들어지는 남자 중등학교는 항일운동의 교육장이 될 것임을 알고 진주일신고등보통학교의 인가 취소를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결국 일신재단은 막대한 토지와 재산을 일제에 빼앗기고 나머지 재산으로 1925년 4월 25일 지금의 마래제백화점 자리(평안동 195번지)에서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변천]
1925년 4월 25일 개교한 후 1938년 4월 1일 진주봉산고등여학교(晋州鳳山高等女學校)로 교명이 변경되었고, 1939년 4월 27일 진주공립고등여학교(晋州公立高等女學校)로 교명이 개칭되면서 공립으로 전환되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 29일 현재의 진주여자고등학교 자리로 이전하였으며, 1946년 9월 1일 진주공립여자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학제는 6년제인 초급 3년과 고급 3년의 18학급으로 인가되었다. 이후 1950년 4월 1일 6년제 진주여자고등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51년 8월 31일 현재의 진주여자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활동사항]
1930년 1월 17일 오전 9시에 이 학교 학생들과 진주고등보통학교(晋州高等普通學校) 학생 500여명이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진주경찰서에서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생 18명과 청년 3명을 검거하여 철야 심문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와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무기 동맹휴학을 선언하였다.
[학생현황]
1939년 4월 6일 진주공립고등여학교 설립인가가 나고, 4월 21일 봉산고등여학교 3, 4학년 학생 155명을 이 학교의 동일한 학년에 전입시켰으며, 4월 22일에는 제1학년 148명의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전체 학생 수는 303명이었다.
[시설현황]
1928년에는 관유지와 육군경리부 소유 토지(현 마래제백화점)의 대부를 받아 교사와 강당 및 부속건물을 신축하였다. 이때 완성을 본 본관 건물은 일본식이 아닌 서양식 건물양식으로 만들었고 건축기술자도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을 고용하여 썼다. 1932년에는 전매국 소유 토지 356평을 사들여 운동장을 확장하고 제1기시설의 완성을 보았다. 1939년에는 같은 육군용지를 빌려 기숙사를 신축하였다.
[교직원 현황]
1925년 4월 25일 윤정하가 초대교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28년 9월 1일 백남훈 교장이 부임하여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할 수 있도록 그 여건을 마련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었다.
[의의와 평가]
비록 본래의 목적대로 남자중학교로 개교하지 못했으나 진주의 교육선각자들이 민족교육의 의지를 담아 심혈을 기울여 세운 학교로서 큰 의의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압제와 감시에도 굴복하지 않고 민족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여성의 몸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시위를 끝없이 전개하여 민족교육의 중요성과 진주의 정신을 잘 보여준 것이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