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0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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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受一 |
영어음역 | Ha Suil |
이칭/별칭 | 태양(太陽),송정(松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판도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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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하면(河沔) |
어머니 | 조정견(趙庭堅)의 딸 |
아내 | 윤언예(尹彦禮)의 딸 |
성별 | 남 |
생년 | 1553년 |
몰년 | 1612년 |
본관 | 진양(晋陽) |
자 | 태역(太易) |
호 | 송정(松亭) |
제향 | 대각서원(大覺書院)[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518번지] |
대표관직 | 상주제독(尙州提督)|경상도사(慶尙道事)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태이(太易), 호는 송정(松亭). 고려 명신 하공진(河拱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면(河沔)이며 어머니는 함안조씨 조정견(趙庭堅)의 딸이다. 부인은 파평윤씨 윤언례(尹彦禮)의 딸과 밀성손씨 손천뢰(孫天賚)의 딸이다.
[생애]
1553년(명종 8)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전수받은 종숙 각재(覺齋) 하항(河沆)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1575년(선조 8) 선산의 향시에 응시하려 가는 도중 경치와 감회를 읊은 「동정부(東征賦)」라는 글을 남겨 문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정랑과 이조정랑을 지내고 외직으로 영산현감과 상주제독, 경상도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귀향하여 진주 수곡에 정사를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면서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등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그는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받들어 어버이의 마음이 기쁘지 않을 때는 뜰에 내려가서 엎드려 절하여 노여움이 풀린 뒤에야 물러났다. 또한 형제끼리 함께 거처하는데 그가 혹시 아우들을 책망하면 두 아우가 모두 엎드려 감히 변명하지 못했다. 만년에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양성하면서 지내다 1612년(광해군 4)에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하수일은 남명과 각재뿐 아니라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수우당은 스승인 남명의 기질을 그대로 닮아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결국 간신들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생을 마친 선비이다. 이러한 송정의 뛰어난 문장과 기개는 한말 대학자이며 문장으로 이름난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에게 이어져 그 빛을 발하였다.
[저술]
문장에 뛰어나 1581년 단성현감의 부탁을 받아 「단성향교성전중수기」를 지었고, 이후 「덕천서원세심정기(德川書院洗心亭記)」, 「수우당명(守愚堂銘)」, 「촉석루세심정기(矗石樓洗心亭記)」 등을 지었다. 문집으로 『송정문집(松亭文集)』이 전한다.
[묘소]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효동 세정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남도 진주시의 대각서원(大覺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수곡면에는 낙수암과 사적비가 있어 송정의 유덕을 기리고 있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