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0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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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演 |
영어음역 | Ha Yeon |
이칭/별칭 | 연량(淵亮),경재(敬齋),신희(新稀),문효(文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백태남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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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하자종(河自宗) |
성별 | 남 |
생년 | 1376년(우왕 2) |
몰년 | 1453년(단종 1) |
본관 | 진주(晋州) |
자 | 연량(淵亮) |
호 | 경재(敬齋)|신희(新稀) |
시호 | 문효(文孝) |
제향 | 종천서원(宗川書院)[경상남도 진주]|신천서원(新川書院)[경상남도 합천] |
대표관직 | 예문춘추관 수찬관|예조판서|대사헌|예조참판|평안도관찰사|대재학|형조판서|좌의정|우의정|영의정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부윤을 지낸 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다.
[생애]
1376년(고려 우왕 2)에 태어나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396년(조선 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춘추관 수찬관이 되었다. 이어 집의, 동부대언, 예조판서를 지냈다. 1423년(세종 5)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는 조계종 등 불교 5종파를 선(禪)·교(敎) 양종,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국가로 환수시켰다. 1425년(세종 7)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이후 예조참판과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한때 천안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형조판서·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지내고 의정부에 들어가 이조의 일을 맡아보았다. 1445년 좌찬성이 되었고 이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49년 영의정에 올랐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간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또 1451년(문종 1)에는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왕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 하자 이에 반대 상소를 올리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1453년(단종 1)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정몽주의 문인으로서 학문의 정도를 지키고자 노력했으며, 시문이 예스럽고 필법이 굳세어 하륜(河崙)이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조선의 숭유배불정책에 충실하여 사찰과 승려에 관한 제도 확립에 앞장섰다.
[저서]
편서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진양연고(晋陽聯藁)』가 있다.
[상훈과 추모]
태종은 그의 간관으로서의 태도가 의연함을 보고 손을 잡아주며 치하하였다고 하며, 1445년(세종 27)에 좌찬성이 되었을 때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받았다. 사후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경상남도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과 경상남도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