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604 |
---|---|
한자 | 晋州乞人-妓生獨立團萬歲運動再現 |
영어의미역 | Representation of the Manse Movement by Jinju Beggars and Gisaeng Independence Corps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행사/행사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정자 |
시작연도/일시 | 1996년 2월 29일 |
---|---|
행사시기/일시 | 2003년 이후 매년 |
행사장소 | 진주시 청소년수련관 광장[구. 진주시청] |
주관처 | 진주문화사랑모임 |
주관기관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칠암동 500-15 |
전화 | 055-759-8840 |
[정의]
3·1운동 당시의 진주걸인·기생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하는 역사문화 이벤트.
[연원/개최경위]
3·1운동 당시 멸시와 천대를 받던 신분인 걸인과 기생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죽음을 겁내지 않고 만세를 불렀던 고귀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진주문화사랑모임에 의해 1996년 2월 29일 처음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변천]
이 행사는 1996년 77년 만에 재현하여 숭고한 3·1운동의 독립정신을 드높였으나 재정문제로 항구적인 행사로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보훈처 진주지청과 서경방송의 후원으로 2003년부터 다시 재현행사를 계속하여 나라사랑과 진주정신을 널리 알리는 역사적인 문화 이벤트로 매년 추진하고 있다. 2005년에는 진주시 당국의 예산 배정으로 전국 규모의 역사문화 이벤트로 승화시킬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경상남도의 후원이 이어져 현재 보훈처, 경상남도, 진주시의 후원으로 재현행사를 계속하게 되었다.
[역사적 관련사항]
3·1운동 당시 진주의 걸인과 기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은 『진주시사』와 『내 고장의 전통』에서 기록해 놓았고, 고은 시인의 시집 『만인보』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알려졌다.
1919년 3월 18일 진주의 걸인 100여 명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우리들이 떠돌아다니며 밥을 벌어먹는 것도 왜놈들이 우리의 재산과 인권을 빼앗아간 때문이며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천만의 동포가 모두 빈곤의 구렁에 빠져 거지가 될 것이다.”고 외치며 거리를 누볐다. 다음날인 1919년 3월 19일 오전에는 한금화(韓錦花)를 비롯한 진주권번(기생조합) 소속 기생 50여명이 태극기를 선두로 남강변을 돌아 촉석루를 향하여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김향화 등 진주 기생 5~6명을 붙잡아 구금했는데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혈서로 썼다고 전해온다.
뿐만 아니라 1919년 3월 25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진주 기생들의 만세의거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기생이 앞서서 형세자못 불온”이라는 기사에서 “십구일은 진주 기생의 한 떼가 구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여섯 명의 검속으로 해산되었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 있다더라.”라고 적혀있다.
[세부행사내용]
망진산 봉수대에서 순국선열에 대한 제례를 지내고 이어 봉화를 점화해 청소년 수련관에서 독립유공자 후손, 시민, 학생이 참석해 본격적인 재현 행사를 진행한다. 간단한 기념식을 가진 후 당시의 진주걸인과 기생의 만세운동을 재현한 연극 ‘걸인이 일어났소, 기생이 일어났소’를 펼친 후, 걸인과 기생으로 분장한 500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횃불과 태극기, 각종 깃발을 앞세우고 중앙광장 진주성 정문을 거쳐 임진계사순의단에 이르러 결의문 을 낭독하고 만세삼창 후 행사를 마친다.
[의의와 평가]
진주걸인·기생들의 만세의거는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 천대받는 신분이었던 걸인과 기생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섰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역사에 묻혀 있던 사실을 조사와 고증을 거쳐 재현하고 ‘독립단’이라는 이름을 붙여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는 이와 같은 행사는 최근 일본의 ‘독도 망언’ 등이 불거져 나온 현실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