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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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株藥洞藥-機銃掃射事件 |
영어의미역 | Machinegunning of Civilians in Yakgol, Juyak-dong, Jinju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주약동 약골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곽병훈 |
성격 | 학살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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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50년 8월 3일 |
종결연도/일시 | 1950년 8월 3일 |
발생(시작)장소 | 경상남도 진주시 주약동 약골 |
발생(시작)장소 | 경상남도 진주시 |
관련인물/단체 | 김사복|정삼근 |
[정의]
한국전쟁 당시 경상남도 진주시 주약동에서 일어났던 미군 전투기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개설]
한국전쟁 당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의 사망도 많았다. 이 중 최근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군이 아닌 한국군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도 미군 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제기되고 있다.
진주지역에서도 1950년 8월 3일(음력 6월 20일)에 진주시 주약동 약골에서 미군 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피난민 40~50여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특히 당시 목격자들은 미군이 사전에 정찰기로 정찰을 마친 후 3~4대의 전투기 편대가 두 차례에 걸쳐 진치령 터널에 숨어 있던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발단]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후 진주지역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진주시 강남동, 망경동, 주약동 주민 등 수백 명은 진주시 주약동 약골의 진치령 터널(길이 240여m)로 대피했다. 진치령 터널에는 당시 많은 진주 주민들이 대피, 터널 안에서 숙식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과]
1950년 8월 3일 오후 5시 정도에 진주시 주약동 방향(현재 주약동 세란병원)에서 3~4대로 구성된 전투기 편대가 출몰해 저녁을 먹으려던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기총사격에 이어 폭격까지 감행했다. 미군 전투기들은 피난민들에게 기총사격을 한 후 선회, 한 차례 더 사격을 가한 후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결과]
진치령 터널 입구에 있던 피난민 40~50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당시 사고 현장에서 오른 쪽 발목에 관통상을 당한 김사복[76세, 진주시 가좌동]은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약동 쪽에서 미군 쌕쌕이 편대가 나타나 기관총 사격을 가해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면서 “터널 안은 떨어져 나간 팔, 다리가 널부러져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미군의 기총사격으로 아버지를 여읜 당시 9세였던 목격자 정삼근[58세, 진주시 주약동]은 “저녁 무렵 전투기가 나타나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십 명이 즉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며 "아버지도 당시 기관총 사격을 받아 즉사해 인근 야산에 안장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목격자인 김영두[65세, 진주시 주약동]는 “사고가 발생한 지 2개월 후 철도 개통을 위해 시신 정리작업을 위해 진치령 터널을 찾았을 때 떨어져 나간 팔과 다리가 완전히 지옥이었다”며 당시의 참혹함을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