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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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自然- 素朴- 樓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석태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조선시대 전통정원의 멋과 풍류를 담은 누정.
[밀양 누정의 정의]
누정은 산수가 좋은 곳에 풍류를 즐기고 강학하기 위하여 지은 누대(樓臺)와 정사(亭榭)를 말한다. 밀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이자,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강이 중간에 흘러가는 산수의 도시이다. 이와 같은 천혜의 자연환경은 밀양강과 밀양강의 지류 북천과 동천, 그리고 낙동강 주변 곳곳에 경관이 빼어난 명승지를 빚어 내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을 중앙으로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연결하여 일본과 교류하던 영남대로가 통과하고, 외곽으로 세곡과 어염 등을 실은 선박의 왕래가 빈번한 낙동강 수로가 지나면서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번영을 구가하여 사대부들의 주도로 많은 누정이 세워졌다. 관아 누정 영남루(嶺南樓)와 덕민정(德民亭)·남수정(攬秀亭)을 제외하고도 사대부들의 많은 누정이 밀양강과 그 지류 북천과 동천, 낙동강 주변 곳곳에 세워졌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조선 후기에 중건되었고, 경관이 아름다운 명소로 지금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밀양 누정문화의 특징]
누정에는 한시·기문·상량문·시조·가사 등 많은 제영 시문(題詠詩文)이 존재한다. 이와 함께 일부의 누정에는 누정의 경관을 그린 그림이 존재하기도 한다. 밀양 누정에도 한시, 기문, 상량문 등 많은 제영 시문이 존재한다. 관아 누정 영남루와 덕민정·남수정만 아니라 사대부들 누정에도 한시, 기문, 상량문 등 많은 제영 시문이 남아 있다. 그중 제영 한시는 우리나라 어느 누정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십이경(十二景)을 중심으로 창작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안평대군의 ‘담담정(淡淡亭) 십이경’이다. 안평대군의 정치적 실각 이후 담담정이 폐쇄되면서 십이경 제영 한시를 이은 작품은 계속 창작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담담정과 동일하게 경관을 안배할 넓고 좋은 자리를 한양만이 아니라 지방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던지 ‘담담정 십이경’을 적극적으로 응용하여 지은 십이경 제영 한시는 우리나라 누정 제영 한시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밀양은 산수의 도시였기 때문에 한강의 담담정과 비슷하게 경관을 안배할 수 있는 넓고 좋은 자리가 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부터 한양의 왕실 누정문화를 깊이 체험한 양녕대군 외손 가문 여주이씨가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이들 여주이씨에 의하여 밀양 누정문화가 주도되면서 제영 한시는 십이경을 중심으로 창작되었다.
[밀양 십이경의 전개 양상]
밀양의 십이경은 1520년경 여주이씨 이태(李迨)의 월연정(月淵亭) 축조와 「월연대십이경(月淵臺十二景)」 창작, 1566년 이태의 조카 이광진(李光軫)의 금시당(今是堂) 축조와 「금시당십이경」 창작이 출발이 된다. 그러나 이태와 이광진의 십이경 한시는 임진왜란으로 유실되고, 조선 후기 후손들이 월연정과 금시당을 중건하면서 함께 복원한 십이경을 토대로 창작한 작품이 현재 전하고 있다.
밀양의 십이경은 이외에 7편이 더 있다. 밀양 수산현 관아 누정이었다가 후일 광주김씨 가문에 하사된 남수정에 대한 「남수정십이경」, 여주이씨 이숙(李潚)의 반계정(盤溪亭)에 대한 「반계정십이경」[4편], 일직손씨 칠산정(七山亭)에 대한 「칠산정십이경」, 여주이씨 이명구(李命九)의 삼은정(三隱亭)에 대한 「삼은정십이경」이 있다.
밀양 누정 제영 한시는 십이경을 십사경(十四景), 십육경(十六景) 등으로 확장한 작품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광주김씨 김태허(金太虛)의 박연정(博淵亭)에 대한 「박연정십사경」과 밀성손씨 손기양(孫起陽)의 칠탄정(七灘亭)에 대한 「칠탄정십육경」이 그것이다.
이 중 금시당의 경우 이광진의 아들 이경홍(李慶弘)이 ‘금시당십이경’을 열두 폭으로 나누어 그리고는 해당 제영 한시를 써서 병풍으로 제작하여 보관하였으며, 칠탄정의 경우 손기양의 후손이 강세황(姜世晃)에게 의뢰하여 「칠탄정십육경도」를 그리고 그림에 맞추어 지은 제영 한시를 적어 화첩으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밀양 누정의 풍류와 강학전통]
1. 전통정원의 아름다움을 담은 월연정
밀양시 용평동 월연(月淵)에 있는 이태의 별업이다. 이태가 1519년 기묘사화를 예견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1520년경 월영사(月影寺) 옛터에 축조하였다. 밀양 영남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남향한 영남루 정면 조망과 충돌하지 않도록 동향으로 누정을 앉혀 영남루 경관과 거의 겹치지 않는 넓고 큰 경관을 열었다. 원형의 훼손을 고려하지 않고 보자면, 우리나라 대표적인 전통정원으로 일컬어지는 경주 독락당, 담양 소쇄원, 영양 서석지, 보길도 부용동 등과 비교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757년 후손들이 중건하여 계속 보수하고 있다. 2012년 국가명승 제87호로 지정되었다[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월연정은 청도 쪽에서 내려오는 북천 물줄기와 울산 쪽에서 내려오는 동천 물줄기가 합수되어 응천을 이루는 추화산 자락에 위치하여 있다. 멀리 엄광산·앵봉·칠탄봉·자씨산·산성산·용두산 등 여러 산들이 성벽처럼 빙 둘러 있고, 가까이 호암에서 백곡까지의 호두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다. 이와 함께 추화산 한 자락이 응천으로 흘러내리며 형성한 양쪽 붉은 바위벼랑이 적벽으로 우뚝 선 가운데 좌측의 것은 앞으로 튀어나와 천연의 대를 이루었고, 북천과 동천을 합수한 응천이 천연의 대를 이룬 좌측 적벽 아래로 달빛을 가득 담을 수 있는 크고 깊은 소를 만들었다. 이 소가 바로 월영연(月盈淵, 月影淵)이다. 칠탄봉에 만월이 뜨면 그 앞에서 월영연까지 강물에 월주경(月柱景)이 서면서 달빛이 크고 깊은 소를 가득 채운다고 하여 ‘월영연’으로 이름이 붙었다. 그 이름이 월연정 전신 월영사의 이름이 되었고 또 월연정의 이름이 되었다.
이태는 먼저 월영연 위쪽 붉은 바위벼랑이 천연의 대를 이룬 곳을 ‘월연대(月淵臺)’로 명명한 다음, 이를 중심으로 월연정 일원의 경관을 안배하고는, 그에 어울리도록 건물을 배치하고 조경을 더하여 아름답게 꾸몄다. 월연대 위에는 작은 정자를 앉혀 중앙에 사방으로 문을 낸 방을 두고 빙 둘러 툇마루를 붙였다. 월연대가 월연정의 내외 경관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눈’의 자리이기 때문에 사방을 개방한 형태로 정자를 앉히면서 강가 바람과 추위 등을 막기 위하여 방을 두고 문을 달아 놓은 것이다. 이곳 정자에서 사방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시선을 원근으로 이동시켜 보면 월연정의 경관이, 월연정의 십이경 경관이 잘 드러난다.
제1경 징담제월(澄潭霽月), 제2경 적벽광풍(赤壁光風), 제3경 용강수죽(龍岡修竹), 제4경 호탄장교(虎灘長橋), 제5경 이연어적(梨淵漁笛), 제6경 백곡초구(栢谷樵謳), 제7경 기암홍화(妓巖紅花), 제8경 금교황운(琴郊黃雲), 제9경 양장모우(羊場暮雨), 제10경 앵수조하(鶯峀朝霞), 제11경 백석수조(白石垂釣), 제12경 전강어화(前江漁火).
월연대 좌측은 산비탈로 가로막혀 외부 경관을 들일 수 없기 때문에 축대를 쌓아 화단을 조성하였다. 뒤쪽과 우측으로 추화산 푸른 숲이 병풍처럼 두르고 앞쪽으로 응천이 천연 해자로 담장처럼 막아선 안쪽 맑은 시내가 흘러내렸던 넓은 터가 월연정 내원이다. 이 시내를 월영연과 관련하여 달맞이하러 흘러가는 시내라는 뜻으로 ‘영월간(迎月澗)’으로 명명하였다. 1903년 경부선 철도 공사 과정에 지하로 터널을 뚫으면서 수원이 사라져 시내가 말라 버렸다. 이태는 이곳 내원에 정자 하나를 더 세우고 달이 비친 하늘과 강물이 모두 거울처럼 맑다는 뜻에서 ‘쌍경당(雙鏡堂)’으로 명명하고, 월연대를 왕래할 때 영월간을 건너는 다리를 쌍경당과 동일한 뜻에서 ‘쌍청교(雙淸橋)’로 명명하였다. 이 내원 일대에 십이경 중 제1경, 제2경, 제5경, 제7경, 제11경, 제12경의 6경이 안배되어 있다.
월연대 앞쪽 칠탄봉을 중심으로 엄광산, 앵봉, 자씨산, 산성산, 용두산 등 여러 산이 멀리 성벽처럼 빙 두른 안쪽이 월연정 외원이다. 이 외원은 가까이 호암에서 백곡까지 북천과 응천의 물줄기를 따라 호두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어서 더욱 그윽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빚어낸다. 호두산 자락 살내마을 앞으로는 흰 돌들이 가득하고 깨끗한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밀양과 인근 사람들에게 활성유원지로 기억되는 명소였다. 이곳 외원 일대에 십이경 중 제3-4경, 제6경, 제8-9경, 제10경의 6경이 안배되어 있다.
이태는 자신과 자신의 가문의 거주지와 전답이 실재하는 곳에다 산과 강을 담장으로 삼아 월연대, 곧 월연정 내원·외원을 설정하고 십이경을 펼쳐 놓았다. 송순(宋純)이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라고 한 그대로 들일 데 없는 월연대 일원의 아름다운 산수자연을 그냥 둘러두고 보았던 것이다. 자연과의 합일에 충실한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멋과 풍류를 온전하게 담아내었다.
2. 차경(借景)이 절묘한 금시당
밀양시 활성동 백곡에 있는 이태의 조카 이광진의 별업이다. 이광진은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정국이 혼미해지자, 외직을 자원하여 담양부사로 나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월연정 아래 용호(龍湖) 위쪽 백곡에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정월에 완공하였다. 이광진은 이 누정을 도연명이 「귀거래사」에서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틀렸음을 깨달았다[覺今是而昨非]”라고 한 말에서 취하여 금시당이라고 하였다.
이광진은 금시당을 축조하면서 건물이 정면으로 종남산을 마주하도록 서향으로 앉혀 남향한 영남루 및 동향한 월연정의 정면 조망과 전혀 충돌되지 않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영남루와 월연정의 경관이 이미 안배된 좁은 공간에 금시당을 앉히면서도 그 속에서 대단히 넓은 경관을 누릴 수 있게 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밀양십경(密陽十景)」을 ‘금시당 십이경’과 비교하여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먼저, 금시당 십이경은 제1경 앵봉춘화(鶯峯春花), 제2경 용벽동황(龍壁冬篁), 제3경 봉암고종(鳳菴孤鍾), 제4경 마암모우(馬巖暮雨), 제5경 연대제월(淵臺霽月), 제6경 사당취연(舍堂炊煙), 제7경 남루화동(南樓畫棟), 제8경 서성효각(西城曉角), 제9경 이연어화(梨淵漁火), 제10경 율림낙엽(栗林落葉), 제11경 백석간양(白石看羊), 제12경 청교목우(靑郊牧牛)이다.
다음, 「밀양십경」은 제1경 우령한운(牛嶺閑雲), 제2경 삽포어화(鈒浦漁火), 제3경 율도추연(栗島秋烟), 제4경 영봉초욱(瑩峯初旭), 제5경 나현적설(羅峴積雪), 제6경 서교수계(西郊修禊), 제7경 남포송객(南浦送客), 제8경 마산비우(馬山飛雨), 제9경 응천조정(凝川釣艇), 제10경 용벽춘화(龍壁春花)이다.
우선 월연정의 중심 월연대와 밀양읍성의 중심 영남루를 제5경 연대제월과 제7경 남루화동으로 들이고 있다. 다음 「밀양십경」과는 밤섬, 서교, 마암산, 용두산 등의 경관을 공유하면서도 「밀양십경」 제3경 율도추연은 제10경 율림낙엽으로, 「밀양십경」 제6경 서교수계는 제8경 서성효각으로, 「밀양십경」 제8경 마산비우는 제4경 마암모우로, 「밀양십경」 제10경 용벽춘화는 제2경 용벽동황으로 고쳐 놓았다. 그 다음 월연정과는 금시당이 놓여 있는 백곡 외에도 용두산, 이연, 양 목장, 앵봉 등의 경관을 공유하면서도 월연정 제3경 용강수죽은 제2경 용벽동황으로, 월연정 제5경 이연어적은 제9경 이연어화로, 월연정 제9경 양장모우는 제11경 백석간양으로, 월연정 제10경 앵수조하는 제11경 앵봉춘화로 각각 고쳐 놓았다. 이렇게 하여 영남루와 월연정 사이 좁은 공간에서 영남루와 월연정에 이미 안배된 경관을 빌려오면서도 금시당만의 독자적인 경관, 우리나라 어느 누정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차경이 절묘한 금시당만의 십이경을 열어내었다.
금시당 경내에는 정면으로 이광진이 손수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450여 년의 은행나무가 서 있고, 좌측으로 백곡서재(栢谷書齋)가 자리 잡고 있다. 1865년 후손들이 백곡서재와 1860년 창건한 사우 백곡사(栢谷祠)를 모체로 백곡서원(栢谷書院)을 세웠지만,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96년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옛 수산대교 오른쪽 암벽에 있는 광주김씨 대종실(大宗室)이다.
남수정(攬秀亭)은 원래 밀양부 속현 수산현 관아 누정이었다. 1538년 부사 장적(張籍)이 수산현 관아 덕민정 서남쪽에 터를 잡아 세웠고, 1539년 부사 어득강(魚得江)이 단청을 한 뒤 ‘남수(攬秀)’로 이름을 지었다. 1543년 부사 박세후(朴世煦)가 덕민정 서북쪽에 관아 부속건물 10여 칸을 증축한 다음 주세붕(周世鵬)에게 「남수정기(攬秀亭記)」를 받았다.
‘남수’라는 말은 당나라 이백이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峯)을 두고 지은 시에서 “구강의 빼어난 풍광 거둬들이네[九江秀色可攬結]”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주세붕은 영남루와 촉석루를 포함하여 낙동강 본류와 지류에 위치한 누(樓)·정(亭)·당(堂)·대(臺) 총 17개 중 그 어느 것도 조망되는 풍광이 남수정에 비견될 것이 없다고 전제한 다음, 여산 오로봉이 구강의 빼어난 풍광을 모두 거두어 놓았듯이 남수정도 낙동강 산수의 빼어난 풍광을 모두 거두어 놓은 낙동강 제일 누정이기 때문에 ‘남수’라고 명명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극찬하였다.
남수정은 덕민정 이래로 조망되는 주변 경관의 빼어남과 광활함으로 조선시대 내내 문인학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또 많은 제영 한시가 창작되었다. 지금 남수정에 광주김씨 김수인(金守訒)의 작품으로 걸려 있는 「남수정십이경」도 그중 한 작품이다. 남수정에서 조망되는 낙동강 일원 밀양시 하남읍에서부터 창원시 대산면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의 경관을 십이경으로 담아 놓았다.
조선 숙종 연간에 홍수에 해일까지 겹쳤던지 갑자기 낙동강이 범람하여 하남들판을 덮친 적이 있었다. 그때 광주김씨 김기(金淇)가 수산창(守山倉)을 불태우고 종을 난타하여 하남들판에서 일을 하던 많은 농민들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 공으로 김기는 조정에서 수산창 일대 지역을 하사받았고, 만년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남수정을 중건하여 강학을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화재로 소실되자 1865년 광주김씨 김난규(金蘭奎)가 중건하였고, 최근에는 광주김씨 가문에서 확장 중건하여 관리하고 있다.
4.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이 절절한 오연정
오연정(鼇淵亭)은 밀양시 교동 모례마을 추화산 자락에 있는 밀성손씨 손영제(孫英濟)의 정사이다. 199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5호로 지정되었다[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밀성손씨 추천(鄒川)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손영제는 만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서재를 지었다. 남향한 영남루, 서향한 금시당, 동향한 월연정의 정면 조망과 충돌을 피하느라 북향을 하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북쪽 안동 예안(禮安)의 스승 이황(李滉)이 살던 도산(陶山)을 향하게 되었다. 손영제는 이 서재에서 지내며 날마다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재가 있던 마을과 그 뒷산을 스승 이황이 살던 예안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모례(慕禮)’라고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재건한 것이 1717년 화재로 소실되자 후손들이 1771년 중건하였다. 순조 연간에 경내에 경현사(景賢祠)[모례사(慕禮祠)]를 세워 손영제의 위패를 봉안하고 모례서원(慕禮書院)을 창건하였다가,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35년 남아 있던 정자 등이 다시 소실되자, 후손들이 1936년 지금의 자리에다 확장 중건하였다.
오연정으로 들어오는 입구 오른쪽 ‘오연’이라고 새겨놓은 빗돌 아래 널찍한 터가 옛 모례서원 자리이고, ‘모례서원경현사유지’라는 비석이 서 있는 곳이 옛 서원 사우가 있었던 곳이다. 서원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큰 은행나무 여러 그루 서 있는 행단이 있다. 고직사 등에 걸려 있는 현판과 여러 기록을 근거하여 보자면, 모례서원은 사우 경현사, 강당 취정당(就正堂), 동재·서재 양진재(養眞齋)와 경행재(景行齋), 문루 영풍루(迎風樓), 장판각 연상판각(淵上板閣) 등의 건물을 갖춘 상당히 큰 규모의 서원이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5. 귀를 열고 보는 칠탄정
칠탄정(七灘亭)은 밀양시 단장면 미촌리 칠탄산 기슭에 있는 손기양의 정사이다.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2호로 지정되었다[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밀성손씨 오한(聱漢)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손기양은 1612년 광해군의 혼정을 피하여 창원부사를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13년 산외면 다죽리 앞쪽 진암(眞巖) 아래 동천 상류 일곱 마을 냇물이 모여 큰 여울을 이루는 시내를 ‘칠리탄(七里灘)’이라고 명명하고는 작은 서재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 관직이 계속 제수되자, 청절이 만고에 드높았던 후한 엄광(嚴光)에게 자신을 비긴 「철조(輟釣)」 시를 지었다. 그리고는 엄광산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이곳 칠리탄에 몸을 더욱 깊이 숨겨 옛날 엄광처럼 청절을 드높였다. 광해군의 혼란한 시대에 당쟁으로 다투는 속인들의 시끄러운 말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뜻에서 ‘오한(聱漢)’으로 자호한 것도 이 무렵일 것이다.
그 뒤 오랜 세월 동안에 퇴폐해진 것을 1725년 후손 손석관(孫碩寬) 등이 중건하고 진암서당(眞巖書堂)이라고 하였다. 1748년 후손 손사익(孫思翼)이 다소 높여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고, 1784년 중수 증축한 뒤 손기양의 「철조」 시의 뜻을 취하여 칠탄정으로 이름을 바꾼 다음 칠탄정의 십육경을 정하여 강세황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이익(李瀷) 등에게 「칠탄정십육경」을 받았다. 칠탄산에서 쏟아지며 세속 티끌을 씻어 주는 세폭(洗瀑)을 옆에 두고, 일곱 마을 냇물이 모여 큰 여울을 이룬 칠리탄을 앞에 두어 가득한 물소리로 속인들이 다투는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높고 깨끗한 세계를 향하여 학덕을 닦아간 손기양이 세상의 속된 소리가 아닌 진리의 참된 소리를 듣는 귀를 열고 보았을 칠탄정 일원의 경관을 십육경으로 정하여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읊어 둔 것이다.
1844년 지역 사림이 손기양의 맑은 절개와 고결한 인품을 기려 경내에 청절사(淸節祠)를 세워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면서 칠탄서원(七灘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다시 칠탄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4년 후학들과 후손들이 칠탄서원유허비를 세웠다. 경내에는 앞쪽으로 칠탄정이 있고, 뒤쪽으로 옛 서원 강당 읍청당(挹淸堂), 동재 벽립재(壁立齋), 서재 겸 문루 운강루(雲江樓)가 있으며, 읍청당 뒤쪽 언덕에는 칠탄서원유허비각 등이 있다.
[밀양 누정의 현재와 앞으로의 보존방안]
밀양의 누정은 1987년 『밀양지』로 일차 정리되고, 2008년 『국역밀양누정록』으로 거의 망라되었다. 그중 일부만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나 시도에서 관리하고 있고, 나머지는 누정을 소유한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20년 동안 급격한 도시화와 고령화로 도심 외곽 농촌마을들이 공동화되면서 개개 문중에서 관리하던 누정은 버려진 것들이 많다. 『국역밀양누정록』에 수록된 누정들이 지금 과연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따라서 밀양의 누정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서는 현황 파악이 시급한 실정이다. 그런 다음 시당국과 시민이 힘을 합쳐 잘 보존하고 교육과 관광 자원으로 적극 활용할 방안을 강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