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4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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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葳 |
영어공식명칭 | Park wi |
이칭/별칭 | 충의군(忠義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병련 |
활동 시기/일시 | 1388년 - 박위 위화도회군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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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89년 - 박위 대마도 정벌 |
활동 시기/일시 | 1389년 - 박위 공양왕을 추대하고 충의군에 책봉 |
몰년 시기/일시 | 1398년 - 박위 사망 |
출생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사당|배향지 | 신남서원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판정로 125-13[정곡리 74] |
성격 | 무신 |
성별 | 남성 |
본관 | 밀성(密城) |
대표 관직 | 참찬문하부사|친군위도진무 |
[정의]
조선 전기 밀양 출신의 무신.
[가계]
박위(朴葳)[?~1398]의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옥성(朴玉成)이고, 할아버지는 박천명(朴天命)이다. 아버지는 보문각대제학 박광후(朴光厚)이고, 어머니는 찬성 김영휘(金永暉)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부인은 판서 윤위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며, 아들은 박기(朴耆)이다. 손자는 박대생(朴大生)·박현생(朴賢生)·박효생(朴孝生)이다.
[활동 사항]
박위는 공민왕의 호위 장교인 우달치로 등용되면서 무장의 길로 들어섰다. 우왕 때 김해부사 및 합포(合浦)의 수령을 거치면서 여러 번의 전투에서 왜구를 격퇴하여 패배를 모르는 상승장군(常勝將軍)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김해부사 재직 시에는 낙동강을 거슬러 밀양에 침입하는 왜선 50척을 전멸시켰다. 1388년(우왕 14)에 이성계(李成桂)·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위화도회군에 참여하고, 이듬해인 1389년에 경상도도순문사가 되어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1만 명의 병력과 전함 100여 척으로 대마도 정벌을 결행하여 적선 300여 척을 불사르고 잡혀간 백성 100여 명을 구출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한 공으로 지문하부사가 되고 충의군(忠義君)에 책봉되었다.
조선 개국 후에는 참찬문하부사를 거쳐 양광도절도사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1394년(태조 3) 밀양의 장님 술사 이흥무(李興茂)의 옥사에 연루되었을 때, 태조는 “박위와 같은 인재는 쉽사리 얻을 수 없다. 천만인이 의심해도 나는 박위를 의심하지 않는다.”라며 박위를 옹호하였다고 한다. 박위는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회안대군 이방간(李芳幹)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상훈과 추모]
1822년(순조 22년) 후손인 박성기의 주청으로 밀양 유림이 공론을 모아 신남서원(莘南書院)을 창건하고 박위·박기 부자를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당은 철거되었으나, 강당은 경보당(景報堂)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실(齋室)로 삼고 박위 부자의 제사를 계속 모셨다. 1981년 후손들의 발의와 지역 유림의 호응으로 신남서원을 1868년 철폐 전의 상태로 복원하였다. 경상남도 창원시에 민영규(閔泳奎)가 비문을 짓고 조한원(趙漢元)이 글씨를 쓴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