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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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晩蕃 |
영어공식명칭 | I Manbe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혜영 |
출생 시기/일시 | 1680년 - 이만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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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무주 도호부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
성격 | 무인 |
성별 | 남 |
[정의]
조선 후기 무주 출신 무인.
[활동 사항]
이만번(李晩蕃)[1680~?]의 본관은 흥양(興陽), 호는 두천(斗川)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에서 출생하였다. 무술 실력이 뛰어나 정희량(鄭希亮)이 살고 있는 경상남도 안의까지 그 소문이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정희량이 가끔 이만번에게 금품과 사람을 보내 가까이 지내려고 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자 정희량이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정희량은 곧 거창과 합천 등을 함락하고 이인좌의 반란군과 합세하기 위하여 북진을 서둘렀다. 정희량이 이끄는 영남의 반란군들은 성초령(省草嶺)을 통하여 무주를 거쳐 한양으로 진군하려고 하였다.
반란의 소식을 들은 이만번은 동생 이만경(李晩景)과 함께 집안의 살림을 털어 군량과 무기를 스스로 장만하고 집안 하인들과 고을의 용맹한 사람들을 일시에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려고 하였다. 마침 무주 도호부사 조유수(趙裕壽)는 선원각(璿源閣)과 사각(史閣)을 지키려 적상산성(赤裳山城)으로 가고 이만번을 천부장(千部將), 최봉래(崔鳳來)를 중군장(中軍將)으로 삼아 본부(本府)의 관군을 거느리고 성초령으로 가서 반란군을 막도록 하였다. 그런데 조유수가 적상산성으로 간 후 곧 병이 나서 군사를 통솔하지 못하게 되어 위기에 처하자, 이만번 등이 마치 군사가 많은 것처럼 반란군을 현혹하여 고개를 넘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정희량은 성초령을 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가 거창에서 체포되었고, 이인좌의 난은 진압되었다.
[상훈과 추모]
고종(高宗) 때 병조 참의로 증직되고 정려(旌閭)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