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481 |
---|---|
한자 | 眞基里 |
영어음역 | Jingi-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소강춘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진목리는 연대 미상의 고목이 마을 가운데 서 있고 당산에 참나무 정자가 있어서 참나무정, 또는 참남정이라 했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진목이라 했다. 내동리는 마을이 산 쪽으로 깊숙이 있다 하여 안골로 부르다 내동으로 바뀌었다. 신기리는 마을이 세워질 때 소득과 발전을 새로운 터전 위에서 닦는다 하여 새터라 불렀다.
[형성 및 변천]
진목리는 1520년(중종 15) 진주형씨가 터를 잡아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진목리는 원래 남원군 고절면 진목리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목리와 내동, 신기리, 금계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진목과 신기의 이름을 따서 이름 지은 진기리에 편입되었다.
당산 주령에는 진주형씨 후손인 형세적의 효자 정려가 있고, 1755년(영조 31)에 세운 어필각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물리친 김천일의 후손과, 진주소씨 소권의 후손, 진주형씨 형상의 후손, 단양우씨, 은진송씨, 청주한씨 등 6성의 종각이 있어 씨족들간의 화목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내동리는 1600년경에 단양우 일가가 경상도 방면에서 임진왜란으로 인해 왜구들의 만행을 피해 방황하다가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지형이 매우 아늑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세의 침입이 어렵다고 판단, 이곳에 터를 잡고 번창하여 우씨 집성촌을 형성하여 40여 호가 살아왔다. 지금은 점차 타 지방으로 이거하고 우씨 12호와 김씨 등이 들어와 15여 호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내동리는 원래 남원군 고절면 내동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목리와 내동 신기리, 금계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진기리에 편입되었다.
신기리는 1600년대에 단양우씨가 경상도에서 이동해 오던 중 외부로부터 잘 발견되지 않은 이곳에 터를 잡게 되어 점차 자손이 번창하면서 우씨 집성촌으로 널리 알려졌다. 신기리는 원래 남원군 고절면 신기리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목리와 내동, 신기리, 금계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진기리에 편입되었다.
[자연환경]
만행산 주봉인 천황봉의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들녘은 남부권 지역 중에서 제일 넓은 들을 갖고 있다. 산세는 주로 야산으로 완만한 경사도를 이루고 있으며, 하천 정비가 비교적 잘 된 진기천이 있다.
[현황]
진기리에는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129세대, 238명(남자 128명, 여자 110명)이 거주하고 있다.
진목리는 미곡 위주의 영농을 하고 있으며, 한우, 한봉, 양돈을 하는 농가가 30여 호 된다. 배나무, 약초 재배를 약간 하고 있다. 진목보건진료소가 있고, 진기교회가 있다. 진기리 석재 단지에 삼정석재, 대정석재, 미로석재, 삼영석재, 용성석재, 인월석재, 대성석재가 있다.
내동리는 깊은 산골짜기에 위치하기 때문에 농경지가 협소하고 천수답이 대부분이며 마을이 가난하여 다른 마을로부터 식량을 빌려서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전 주민이 단결하여 저수지 2개소를 설치하여 농경지 개답 및 수리 시설, 농로 개설 등 소득 증대에 역점을 두고 있다. 마을 뒤쪽 석산을 개발하면서 소음 공해로 민원이 발생하곤 한다.
신기리는 1944년 저수 시설로 진기제가 완공되어 수리안전답으로 조성, 식량 증산에 기여하고 있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수복 후 모든 주택을 다시 지었다. 1970년대에 마을회관 1동, 창고 1동을 짓고, 소하천 정비, 이웃 마을간의 도로 개설로 농촌 문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97년 경지 정리가 완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