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483
한자 尺門里
영어음역 Cheongmu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척문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소강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면적 3.02㎢
총인구(남, 여) 483명(남자 250명, 여자 233명)[2014년 12월 31일 기준]
가구수 200세대[2014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척동리는 마을에 잣나무가 많아 잣골이라 하였다. 그 후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뒷산에 옥녀가 베를 짜는 옥녀직금 형국이 있는데 그중 잣골은 옥녀가 비단을 재는 자에 해당된다고 하여 척동(尺洞)으로 고쳤다고 한다.

연산군고죽동(高竹洞)에 거주하던 유자광(柳子光)이 마을 뒤로 흐르는 요천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수문을 만들어 폐문루(閉門樓)를 세우고 아침, 저녁으로 고기를 잡아 임금의 수라상에 올렸다고 한다. 폐문리는 폐문루에서 수문을 열고 닫는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척동과 폐문의 이름을 따서 척문리가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척동리는 파평윤씨가 최초로 정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연대나 근원은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때 성규남의 12대조가 창녕에서 내려와 주천 용담에서 거주하다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잣나무가 무성한 백암방 옥녀봉 아래 잣골에 정착하였으며 때를 같이하여 이씨, 양씨, 김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본래 남원군 백암면 척동리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척동리와 폐문리가 병합되어 척동과 폐문의 이름을 따서 척문리라 하고 척문리에 편입되었다.

폐문리는 1825년경 경주김씨 12대손 김성수가 최초로 정착하여 마을을 세웠다. 그 후 폐문리에서 약 500m 지점인 목넘어(산맥이 누에 형태를 갖춘 누에의 머리 형국)에 풍천임씨가 정착하였다. 가운데 씨야골(씨앗골)에는 해주오씨가, 광바위 부근에는 순흥안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번성하였다.

본래 남원군 백암면 폐문리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척동리와 폐문리가 병합되어 척동과 폐문의 이름을 따서 척문리라 하고 척문리에 편입되었다.

[자연환경]

척동리 앞으로는 백암천이 흐르고 뒤로는 요천이 흐르고 있으며 옥녀봉, 수리봉을 배경으로 앞에는 무동산(舞童山)이 있다. 뒷산에는 백제시대에 축조된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 신라와 백제 국경선 상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폐문리 앞으로는 백암천이 흐르고 뒤로는 요천이 흐르고 있다. 약 500m 지점은 목넘어 또는 누에머리골이라 하는데 그 형상이 누에의 머리와 같다고 전한다. 서북방 700m 지점에는 광바위가 있다.

[현황]

2007년 기준 척문리의 전제 면적은 3.02㎢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200세대에 483명(남자 250명, 여자 23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소득원은 쌀과 보리이다. 남원시와 4㎞ 떨어진 곳으로 생활권은 남원시 내에 속한다.

2014년 12월 31일 현재 척동리는 총 133세대에 32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전체 면적 2.01㎢ 중 밭이 0.17㎢, 논이 0.84㎢, 임야가 0.76㎢, 기타 0.24㎢를 나타낸다. 주요 시설로는 오동초등학교와 오동교회가 있다.

2014년 12월 31일 현재 폐문리는 총 67세대에 15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전체 면적 1.01㎢ 중 밭이 0.08㎢, 논이 0.25㎢, 임야가 0.57㎢, 기타 0.11㎢를 나타낸다. 폐문리 뒤쪽으로는 남원~순천 간 4차선 국도가 통과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