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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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十碑石群 |
영어음역 | Samsip Biseokgun |
영어의미역 | Thirty Monument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 78[요천로 1447]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유종국 |
성격 | 비석|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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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선정비 양식 |
건립시기/연도 | 조선 전기|조선 중기|조선 후기|조선 말기 |
관련인물 | 이서구|민여임|이상억 등 30명 |
높이 | 본문 참조 |
길이 | 본문 참조 |
둘레 | 본문 참조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 78[요천로 1447] |
소유자 | 남원시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조선시대 남원 관리의 공적을 기록한 30개의 비.
[개설]
광한루원 안의 춘향사(春香祠) 옆에 30기의 비석이 담장을 따라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다. 전라도나 남원에 수령이나 어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거나 남원 지역민에게 덕을 베푼 사람들에 대한 선정비·불망비·선덕비·사적비·시혜비이다. 본래 동헌이나 부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것을 광복 후에 이곳으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30기의 비석군이 한 자리에 모아 보존된 것도 전국적으로 흔치는 않다.
[건립경위]
○ 삼청이정사적비(三廳釐正事蹟碑): 남원부사 이식이 진상청·보민청·연호청 삼청의 문란을 바로잡은 공적을 새긴 사적비로 1748년(영조 24)에 세웠다.
○ 부사이후상억사적비(府使李侯象億事蹟碑): 『남원지』에 의하면 이후억은 1855년(철종 6) 남원부사로 재임하면서 광한루를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 이용준영세불망비(李容準永世不忘碑): 1938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용준은 1879년(고종 16) 광한루가 북쪽으로 기울어지자 추대목의 묘안을 받아들여 월랑을 건립한 부사이다.
○ 관찰사이서구영세불망비(觀察使李書九永世不忘碑): 1882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서구[1754~1825]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낙서, 호는 척재이다. 1793년(정조 17)과 1820년(순조 20) 두 차례 전라관찰사를 지냈으며 남원군 수지면 견두산 주변에서 잦은 재변이 일어나자 견두산을 제압하도록 호석을 남원부 중에 세워 재난을 막았다. 일설에 판소리 단가 「호남가」를 지어 전라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전라도민을 사랑하였다고 전한다.
○ 부사조위수유혜비(府使趙渭叟遺惠碑): 조위수는 1680년(숙종 6) 8월부터 1683년 7월까지 남원부사를 지냈다. 이 비는 1684년에 새웠는데 비가 부러져 1688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남원부사 조위수는 용성관 부근에 있다가 정유재란 때 없어졌다는 과목전(果木田)을 복원한 인물이라고 전한다.
○ 부사김영근불망비(府使金泳根不忘碑): 1848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김영근은 1866년(고종 3)에 남원부사를 지냈다.
○ 부사민여임선정비(府使閔汝任善政碑): 민여임은 본관은 여흥, 자는 성지(聖之), 호는 취옹(醉翁), 진의(振衣)이다.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의 접반관이 되었다. 1599년 형조정랑을 역임하고 이듬해 예조정랑, 그 이듬해 병조정랑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사간을 지내고,1614년(광해군 6) 남원부사, 1626년(인조 3) 공조참판을 지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 부사박정선정비(府使朴炡善政碑): 박정은 1629년(인조 7)에 남원부사를 역임하였다.
○ 부사박종대선정비(府使朴宗大善政碑): 박종대는 1818년 3월(순조 18)부터 1819년 5월까지 남원부사를 지냈다. ‘술이월일립(戌二月日立)’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1826년 병술년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한다.
○ 부사홍집규선정비(府使洪集圭善政碑): 앞면의 처음 나오는 세 글자가 마멸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남원부사를 지낸 사람 가운데 홍집규가 1811년(순조 11)에서 1813년(순조 13)까지 남원부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홍집규가 어사를 지낸 적이 있어서 부사라고 쓰지 않고 어사라고 썼다고 본다면, 이 비석은 1848년(헌종 14) 9월에 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부사조병문선정비(府使趙秉文善政碑): 조병문은 1858년(철종 9) 남원부사를 지냈다. 1875년(고종 12)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 부사안응수선정비(府使安膺壽善政碑): 1875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안응수는 1864년(고종 1)에 남원부사를 지낸 바 있다.
○ 부사홍병희불망비(府使洪秉僖不忘碑): 홍병희는 1874년(고종 11) 남원부사를 지냈다. 1875년(고종 12)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 부사정엄선정비(府使鄭淹善政碑): 정엄은 1573년(선조 6)에 남원부사를 지냈다.
○ 부사남진화불망비(府使南進和不忘碑): 남진화는 1822년(순조 22) 남원부사를 지냈다. 1825년(순조 25)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 부사조명교선정비(府使趙命敎善政碑): 조명교는 1867년(고종 4)에 남원부사를 지낸 바 있다. 1875년(고종 12)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 부사조진익불망비(府使趙鎭翼不忘碑): 조진익은 1815년(순조 15)에 남원부사를 지낸 바 있다. 1848년(헌종 14)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 현감남주헌선정비(縣監南周獻善政碑): 남주헌은 1815년(순조 15)에 남원부사를 지냈다. 1825년(순조 25)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 관찰사이헌직불망비(觀察使李憲稙不忘碑): 이헌직은 1886년(고종 23) 전라관찰사를 지냈다.
○ 부사김윤현불망비(府使金胤鉉不忘碑): 김윤헌은 1886(고종 23)에 남원부사를 지냈다.
○ 좌영장배상규선정비(左營將裵尙珪善政碑): 1702년(숙종 28)에 남원부 진영에 속해 있던 곡성·옥과·구례·창평·장수·운봉 일곱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웠다.
○ 어사심동신불망비(御使沈東臣不忘碑): 1638년(인조 16)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삼도토포사김시풍불망비(三道討捕使金始豊不忘碑): 김시풍(1836~1894)은 조선 후기 무관이다. 자는 태화(泰華), 호는 추당(秋塘), 본명은 명기(明琦), 본관은 강진(康津)이다. 1871년(고종 8년) 무과에 급제하여 1876년 이후 순천영장겸삼도토포사를 지냈고, 1894년 전주영장으로 재임할 당시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이 때 동학농민혁명에 가담 혐의로 홍계훈에게 체포되어 고문당하다가 남문시장에서 효수되었다. 이 비석은 18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부사송상인청백비(府使宋象仁淸白碑): 1629년(인조 7)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송상인은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조운을 감독하고 이어서 남원부사 등을 지냈다.
○ 북시장개창비(北市場開創碑): 이 비석은 남원 북시장을 개창한 내용의 비를 세웠는데 이 비가 퇴락하여 없어지자 다시 그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남원 북시장은 현재 남원의료원이 있는 자리로 1900년 이태정(李台挺) 군수가 열었다고 한다. 이태정은 고종 36년에 남원군수로 부임하여 1년간 재임하였다. 1924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 관찰사이돈상불망비(觀察使李敦相不忘碑): 1818년(순조 18) 세운 것으로 보인다.
○ 부사성안의비(府使成安義碑): 1611년(광해군 3)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광한루원 동쪽 연못가 약 30미터 지점에 있다.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의 아버지 비석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위치]
모두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 78번지[요천로 1447]에 소재한 남원 광한루원 안에 있다.
[형태]
기본적으로 30여 기의 비석이 선정비 형태로 존재한다. 앞줄 16기가 세워져 있고, 뒷줄에 14기가 세워져 있다. 한 줄의 길이는 20m요, 앞줄과 뒷줄의 간격은 4m 정도이다.
○ 삼청이정사적비(三廳釐正事蹟碑): 대리석 비신에 귀부와 이수로 되어 있는데, 귀부와 이수 조각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면과 후면에 비문이 새겨 있다. 비석의 총길이는 340㎝이다. 비신의 높이 187㎝, 폭 60㎝, 두께 30㎝이다. 귀부의 길이 169㎝, 넓이 195㎝이다. 이수의 길이 81㎝이다.
○ 부사이후상억사적비(府使李侯象億事蹟碑)
화강암 비석으로 총길이는 215㎝이다. 비신의 높이 162㎝, 폭 65㎝, 두께 34㎝이다. 농대석 전면 가로 63㎝ 세로 78㎝, 지붕돌[가첨석]은 가로 157㎝, 세로 175㎝이다.
○ 이용준영세불망비(李容準永世不忘碑)
화강암으로 된 월두비로 비신의 높이 173㎝, 폭 62㎝, 두께 28㎝이다. 농대석 앞 길이가 92㎝, 옆 길이가 59㎝이다.
○ 관찰사이서구영세불망비(觀察使李書九永世不忘碑)
총높이 180㎝, 비신의 높이 132㎝, 폭 57㎝, 두께 20㎝이다. 농대석 앞 길이가 100㎝, 옆 길이가 66㎝이다. 지붕돌은 앞 길이가 107㎝, 옆 길이가 73㎝이다.
○ 부사조위수유혜비(府使趙渭叟遺惠碑)
귀부와 이수를 갖추었고 총길이는 257㎝이다. 비신의 높이 154㎝, 귀부 50㎝, 이수 53㎝이다. 비폭은 65㎝×26㎝, 귀부의 앞과 옆 길이는 100㎝×110㎝이다. 이수의 앞과 옆의 길이는 97㎝×52㎝이다.
○ 부사김영근불망비(府使金泳根不忘碑)
비신의 총길이는 281㎝이다. 좌대 40㎝, 비신 151㎝, 지붕돌 90㎝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71㎝×23㎝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이 84㎝×130㎝이다. 지붕돌은 앞과 옆이 84㎝×30㎝이다. 지붕돌이 비신을 한 개의 돌로 만든 것이 특색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71㎝×20㎝이다.
○ 부사민여임선정비(府使閔汝任善政碑)
비석의 총길이는 220㎝이다. 농대석 40㎝, 비신 130㎝, 지붕돌 50㎝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137㎝×80㎝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130㎝×40㎝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71㎝×23㎝이다.
○ 부사송수연불망비(府使宋守淵不忘碑)
비석의 총길이는 279㎝이다. 농대석 40㎝, 비신 160㎝, 지붕돌 79㎝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63㎝×75㎝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95㎝×32㎝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74㎝×22㎝이다.
○ 부사박정선정비(府使朴炡善政碑)
비석의 총길이는 264㎝이다. 농대석 40㎝, 비신 160㎝, 지붕돌 64㎝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123㎝×75㎝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100㎝×45㎝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70㎝×19㎝이다.
○ 부사박종대선정비(府使朴宗大善政碑)
총길이 215m이다. 농대석 45㎝, 비신 120㎝, 지붕돌 50㎝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62㎝×52㎝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60㎝×40㎝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53㎝×16㎝이다.
○ 부사이병석불망비(府使李秉奭不忘碑)
비석의 총길이는 219㎝이다. 농대석 40㎝, 비신 140㎝, 지붕돌 39㎝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79㎝×55㎝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92㎝×54㎝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50㎝×15㎝이다.
○ 부사홍집규선정비(府使洪集圭善政碑)
비석의 총길이는 211㎝이다. 농대석 35㎝, 비신 146㎝, 지붕돌 30㎝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59㎝×30㎝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86㎝×49㎝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57㎝×17㎝이다.
○ 부사조병문선정비(府使趙秉文善政碑)
비석의 총길이는 270㎝이다. 농대석 42㎝, 비신 140㎝, 지붕돌 88㎝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97㎝×64㎝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67㎝×49㎝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54㎝×20㎝이다.
○ 부사안응수선정비(府使安膺壽善政碑)
비석의 총길이는 199㎝이다. 농대석 35㎝, 비신 131㎝, 지붕돌 33㎝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87㎝×53㎝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100㎝×68㎝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56㎝×20㎝이다.
○ 부사홍병희불망비(府使洪秉僖不忘碑)
비석의 총길이는 213㎝이다. 농대석 40㎝, 비신 126㎝, 지붕돌 47㎝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73㎝×47㎝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96㎝×64㎝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53㎝×15㎝이다.
○ 부사정엄선정비(府使鄭淹善政碑)
비석의 총길이는 261㎝이다. 농대석 49㎝, 비신 146㎝, 지붕돌 66㎝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200㎝×129㎝이며,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146㎝×25㎝이다.
○ 부사남진화불망비(府使南進和不忘碑)
비신의 높이는 139㎝, 폭 52㎝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은 82㎝×60㎝이다.
○ 부사조명교선정비(府使趙命敎善政碑)
비신의 높이는 129㎝, 넓이 49㎝, 두께 13㎝이고,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99㎝×60㎝이며, 지붕돌의 높이, 폭, 옆은 36㎝×85㎝×53㎝이다.
○ 부사조진익불망비(府使趙鎭翼不忘碑)
비신의 높이·폭·옆은 133㎝×53㎝×15㎝이며, 농대석의 폭과 옆은 90㎝×53㎝이며, 지붕돌의 높이·폭·옆은 31㎝×89㎝×49㎝이다.
○ 현감남주헌선정비(縣監南周獻善政碑)
비신의 높이·폭·옆은 139㎝×51㎝×17㎝이며, 농대석의 폭과 옆은 98㎝×62㎝이며, 지붕돌의 높이·폭·옆은 37㎝×96㎝×55㎝이다.
○ 관찰사민■■선정비(觀察使閔■■善政碑)
비갓이 없는 월두형 비석이다. 비신의 높이·폭·옆은 172㎝×53㎝×18㎝이며, 농대석의 폭과 옆은 97㎝×43㎝이다.
○ 관찰사이헌직불망비(觀察使李憲稙不忘碑)
월두형 비석으로 농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다. 비신의 높이·폭·옆은 164㎝×55㎝×25㎝이다. 농대석의 폭과 옆은 102㎝×61㎝이다.
○ 어사이■상불망비(御使李■相不忘碑)
월두형 비석으로 농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다. 비신의 높이·폭·옆은 157㎝×54㎝×16㎝이다. 농대석의 폭과 옆은 93㎝×49㎝이다.
○ 부사김윤현불망비(府使金胤鉉不忘碑)
월두형 비석으로 농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다. 비신의 높이·폭·옆은 164㎝×63㎝×23㎝이다. 농대석의 폭과 옆은 92㎝×59㎝이다.
○ 좌영장배상규선정비(左營將裵尙珪善政碑)
사각의 농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커다란 사각형의 둥근 봉우리에 무늬가 곁들인 지붕돌을 얹었다. 비신의 높이·폭·옆은 161㎝×59㎝×24㎝이다. 농대석의 폭과 옆은 103㎝×74㎝이며, 지붕돌의 높이·폭·옆은 64㎝×88㎝×64㎝이다.
○ 어사심동신불망비(御使沈東臣不忘碑)
농대석과 지붕돌이 갖추어져 있다. 비신의 높이·폭·옆은 135㎝×54㎝×19㎝이다. 농대석의 폭과 옆은 112㎝×66㎝이며, 지붕돌의 높이·폭·옆은 44㎝×87㎝×54㎝이다.
○ 삼도토포사김시풍불망비(三道討捕使金始豊不忘碑)
농대석과 지붕돌이 갖추어져 있다. 비신의 높이·폭·옆은 164㎝×55㎝×20㎝이다. 농대석의 폭과 옆은 112㎝×66㎝이며, 지붕돌의 높이·폭·옆은 43㎝×98㎝×63㎝이다.
○ 부사송상인청백비(府使宋象仁淸白碑)
커다란 농대석과 지붕돌이 있다. 지붕돌에는 아로새긴 꽃무늬 위에 꽃봉오리가 아름답게 새겨 있다. 비신의 높이·폭·옆은 140㎝×76㎝×23㎝이다. 농대석의 폭과 옆은 125㎝×88㎝이며, 지붕돌의 높이·폭·옆은 60㎝×110㎝×23㎝이다.
○ 관찰사이돈상불망비(觀察使李敦相不忘碑)
비신의 높이·폭·옆은 142㎝×52㎝×20㎝이다. 농대석의 폭과 옆은 90㎝×60㎝이며, 지붕돌의 높이·폭·옆은 37㎝×82㎝×54㎝이다.
[금석문]
돌에 새긴 비문은 아직 탁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된 비석이거나 석질이 좋지 않은 비석은 마멸되어서 글씨가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많다.
○ 부사이후상억사적비(府使李侯象億事蹟碑): 앞면에는 ‘부사이후상억사적비(府使李侯象億事蹟碑)’, 뒷면에 ‘숭정후재임술맹하립(崇禎後再壬戌孟夏立)’이라 새겨져 있다.
○ 이용준영세불망비(李容準永世不忘碑): 앞면에는 ‘아후이공용준영세불망비(我侯李公容準永世不忘碑)’, 뒷면에 ‘숭정기원후오무인구월일립(崇禎紀元後五戊寅九月日立)’이라 새겨져 있다.
○ 관찰사이서구영세불망비(觀察使李書九永世不忘碑): 전면에 ‘관찰사이공서구영세불망비(觀察使李公書九永世不忘碑)’, 뒷면에 ‘숭정기원후사임오중동립(崇禎紀元後四壬午仲冬立)’이라 새겨 있다.
○ 부사조위수유혜비(府使趙渭叟遺惠碑): 앞면에 부사 ‘조령공위수유혜■사비(府使趙令公渭叟遺惠■思碑)’라고 새겨져 있으나 글자가 우측에 8자, 좌측에 4자는 거의 마멸되어 알아 볼 수 없다. 뒷면에는 ‘세이거갑자건비중년복절무진십이월중건(歲二去甲子建碑中年復折戊辰十二月重建)’이라고 새겨져 있다.
○ 부사김영근불망비(府使金泳根不忘碑): 앞면에는 ‘부사김후영근영세불망비(府使金侯泳根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은 마멸되어 알아 볼 수 없다. 아랫 부분에 ‘계묘팔월(癸卯八月)’이란 것만 남아 있다.
○ 부사민여임선정비(府使閔汝任善政碑): 앞면에는 ‘부사영공민여임청덕선정비(府使令公閔汝任淸德善政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는데 마멸되어 11월이라는 글자만 알아 볼 수 있다.
○ 부사송수연불망비(府使宋守淵不忘碑): 앞면에는 ‘부사송후수연영세불망비(府使宋侯守淵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정축구월립(丁丑九月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 부사박정선정비(府使朴炡善政碑): 앞면에는 ‘부사박정선정비(府使朴侯公炡善政碑)’라고 새겨 있고, 후면에는 ‘숭정삼년십이월립(崇禎三年十二月立)’이라고 새겨 있다.
○ 부사박종대선정비(府使朴宗大善政碑): 앞면에는 ‘부사박공종대선정비(府使朴公宗大善政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은 마멸되어 자세히 알 수 없고 다만, ‘■술이월일립(■戌二月日立)’이라는 글씨만 보인다.
○ 부사이병석불망비(府使李秉奭不忘碑): 앞면에는 ‘이후병석영세불망비(府使李侯秉奭永世不忘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계유육년립(啓喩六年立)’이라 새겨 있다. 비의 좌측면에는 ‘결호동락 군정함송(結戶同樂 軍情咸頌)’, 우측면에는 ‘민고박흠 동포균배(民庫薄欽 洞布均排)’라고 새겨 있다.
○ 부사홍집규선정비(府使洪集圭善政碑): 앞면에는 ‘어사홍공집규애민선정비(御使洪公集圭愛民善政碑)’라 새겨 있는 것으로 보아 어사 홍집규의 선정비이다. 뒷면에는 ‘무신구월(戊申九月)’이라 새겨 있다. 앞면의 처음 나오는 세 글자가 마멸되어 있다.
○ 부사조병문선정비(府使趙秉文善政碑): 앞면에는 ‘부사조후병문선정비(府使趙侯秉文善政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을해구월(乙亥九月)’이라 새겨 있다.
○ 부사안응수선정비(府使安膺壽善政碑): 앞면에는 ‘부사안공응수선정비(府使安公膺壽善政碑)’라고 새겼고 좌우측 글씨는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마멸되었다. 뒷면에는 ‘을해구월립(乙亥九月立)’이라는 기록되어 있다.
○ 부사홍병희불망비(府使洪秉僖不忘碑): 앞면에는 ‘부사홍후병희불망비(府使洪侯秉僖不忘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을해구월일(乙亥九月日)’이라 새겨 있다.
○ 부사정엄선정비(府使鄭淹善政碑): 앞면에는 ‘부사정영공엄선정비(府使鄭令公淹善政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사년육월(■■四年六月)’이라 새겨 있다.
○ 부사남진화불망비(府使南進和不忘碑): 앞면에는 ‘부사남진화영세불망비(府使南進和永世不忘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을유오월일립마청수(乙酉五月日立馬廳竪)’이라 새겨 있다.
○ 부사조명교선정비(府使趙命敎善政碑): 앞면에는 ‘부사조후명교선정비(府使趙侯命敎善政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을해구월(乙亥九月)’이라 새겨 있다.
○ 부사조진익불망비(府使趙鎭翼不忘碑): 앞면에 ‘부사조공진익영세불망비(府使趙公鎭翼永世不忘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무신육월(戊申六月)’이라 새겨 있다.
○ 현감남주헌선정비(縣監南周獻善政碑): 앞면에 ‘현감남영공주헌애민선정비(縣監南令公周獻愛民善政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 글에 ‘을유윤사월(乙酉閏四月)’이라 새겨 있다.
○ 관찰사민■■선정비(觀察使閔■■善政碑): 앞면에 ‘관찰사민공■■■■선정비(觀察使閔■■■■善政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과 좌우측면의 글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 관찰사이헌직불망비(觀察使李憲稙不忘碑): 앞면에 ‘관찰사이상공헌직휼민유애만세불망비(觀察使李相公憲稙恤民遺愛萬世不忘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을축삼월일립(乙丑三月日立)’이라 새겨 있다.
○ 어사이■상불망비(御使李■相不忘碑): 앞면에 ‘어사이공■상선정불망비(御使李公■相善政不忘碑)’라고 새겨 있으나 마멸되어 이름을 판독할 수 없고 좌측 네 글자도 마멸로 인해 판독할 수 없다. 뒷면에 ‘임진팔월일(壬辰八月日)’이라 새겨 있다.
○ 부사김윤현불망비(府使金胤鉉不忘碑): 앞면에 ‘부사김후윤현영세불망(府使金侯胤鉉永世不忘)’이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정해사월(丁亥四月)’이라 새겨 있다.
○ 좌영장배상규선정비(左營將裵尙珪善政碑): 앞면에 ‘좌영장배상규선정비(左營將裵令公尙珪淸簡愛卒善政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강희사십일년칠월칠읍동립(康熙四十一年七月七邑同立)’이라 쓰여 있다.
○ 어사심동신불망비(御使沈東臣不忘碑): 앞면에는 어사심공동신영세불망비(御使沈公東臣永世不忘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 숭정기원무인구월립(崇禎紀元戊寅九月立)이라 새겨 있다.
○ 삼도토포사김시풍불망비(三道討捕使金始豊不忘碑): 앞면에는 ‘삼도토포사김공시풍영세불망비(三道討捕使金公始豊永世不忘碑)’라고 새겨 있고, 비신 좌측에는 ‘천■■적 리문야벽(千■■跡 里門夜闢)’, 우측에는 ‘삼도안절 상여안업(三道按節 商旅安業)’이라 새겨 있다. 뒷면에 ‘계사칠월좌도우사보상립(癸巳七月左道右社褓商立’이라 새겨 있다.
○ 부사송상인청백비(府使宋象仁淸白碑): 앞면에는 ‘부사송공상인청백비(府使宋公象仁淸白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숭정이년칠월일(崇禎二年七月日)’이라고 새겨 있다.
○ 북시장개창비(北市場開創碑): 비문 내용은 이렇다. “군수 이태정과 이덕홍이 지난 경자년 북쪽 터(北場)에 저자거리를 열었다. 한량 이익권·양상준이 사적비를 만들어 마침내 이곳에 이르게 되었다. (비가) 퇴락하자 노수향·정태원이 후손들과 함께 옮겨 세웠다. 이병근·박갑수가 이것을 보고서 잊지 않았다. 남원부민들이 위안을 삼고 기뻐하였는데 이 뜻이 널리 퍼져 나아갔다. 1924년 9월에 세우다.”
○ 관찰사이돈상불망비(觀察使李敦相不忘碑): 앞면에 ‘관찰사이공돈상영세불망비(觀察使李公敦相永世不忘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숭정기원후삼무인구월일립(崇禎紀元後三戊寅九月日立)’이라 하여 새겨 있다.
○ 부사성안의비(府使成安義碑): 전면에는 ‘부사성공안의선■■■(府使成公安義善■■■)’ 라고 새겨 있다. 마멸로 글자를 알아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