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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794
한자 金光奭
영어음역 Kim Gwangseok
이칭/별칭 자굉,쌍송당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출신지 전라북도 남원시
성별
생년 1581년연표보기
본관 경주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굉(子宏), 호는 쌍송당(雙松堂). 제숙공(齊肅公) 김균(金稛)의 8세손이며, 참의(參議) 김위(金偉)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김광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자라서는 지절이 강개하여 서울의 사우들이 충의의 선비로 존경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아들 김경장·김경적과 조카 김원건·김원구·김원중 등과 함께 맹세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온 도리이다. 더구나 우리 집안은 나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으니, 자신을 잊고 싸움터로 나가서 모두가 죽더라도 웃고 돌아와서 선왕을 상천에서 배알한다면 마음이 매우 즐거울 것이다. 우리 4~5인 중에서 만약에 마음을 달리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적이나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군량 100석과 집안의 노비 50명을 내어 각처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여러 고을의 의병들과 여산에서 만나 대열을 정비하여 청주로 달려가 적병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야밤에 과천에 올라가 적군의 군영을 습격하여 적병 500~600명을 죽였다. 이 때 김광석은 남한산성에 있던 조카 독전어사(督戰御史) 김경여(金慶餘)를 만났는데, 김경여가 그들이 세운 공을 인조에게 알렸다.

그러던 중 강화가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사람들과 통곡하고 군사를 해산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정자 앞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는, 정자의 이름을 쌍송당이라 하였다. 이는 조상에게는 지극한 정성을 드리며, 나라에는 시련에도 꿋꿋이 절개를 지킨다는 뜻에서 딴 것이다.

[상훈과 추모]

김광석은 사복시정으로 증직(贈職)되었으며, 용대사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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