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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814
한자 金元立
영어음역 Kim Wonrip
이칭/별칭 사탁,갈천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아산리
성별
생년 1590년연표보기
본관 경주
대표관직 능주목사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갈천(葛川). 계림군(鷄林君) 제숙공(齊肅公) 김균(金稛)의 후손이고, 부제학(副提學) 김신민(金新民)의 7세손이며, 참판 김성진(金聲振)의 둘째 아들이다.

[활동사항]

김원립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1613년(광해군 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 때 광해군영창대군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자 홍무적(洪茂績) 등 뜻을 같이하는 여러 선비들과 격렬한 상소를 올려 맞섰다.

그 일로 인하여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가,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풀려나왔다. 그리고 이어 1627년(인조 5)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뒤 능주목사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조정으로부터 국난 극복을 호소하는 교서가 내려오자, 김원립은 바로 군사를 모아 전주로 달려가서 형 김원중 등 여러 의사들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였다. 북쪽으로 진격하여 이듬해 정월 4일에 과천에 이르러 많은 적병을 죽였다.

이 때 독전어사(督戰御史)인 팔촌 형 김경여(金慶餘)가 이 사실을 인조에게 알려 인조로부터 큰 칭찬을 들었다. 얼마 후에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형제들은 울분을 토하며 군사를 해산하였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하였다. 또한 홍문관과 명예문관의 양관제학(兩館提學)과 예조판서의 증직(贈職)이 내려졌다. 현석(玄石)박세채(朴世采)가 그의 묘갈명을 지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9.28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현석 박세채(朴世采)가 그의 묘갈명을 지었다.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그의 묘갈명을 지었다. 〇 현석은 호(號)이므로 인명 태깅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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