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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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尙馨 |
영어음역 | Yi Sanghyeong |
이칭/별칭 | 덕선,천묵재,충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윤진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선(德先), 호는 천묵재(天黙齋). 효령대군의 7대손이며, 춘성군 이담손(李聃孫)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이욱(李昱)이며, 어머니는 임대영(任大英)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2년(광해군 4) 사마시를 거쳐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에 들어가 1628년 학록(學錄)에 오르고, 곧 가주서로 경연관이 되고 시강원설서와 사서를 역임한 뒤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오섬·김여옥·신응망 등과 함께 도내에 격문을 돌렸으며, 전라도로 온 세자를 호종하였다. 호소사의 막부로 들어가서 의병을 모았으나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중단하였다.
1630년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으로 전직하고, 이어 병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으로 전직되었다. 문학(文學)으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고 또 직강을 역임한 뒤, 다시 정언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다음해 옥과현감으로 나갔다가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 화의를 건의하는 최명길(崔鳴吉) 등을 탄핵하였다. 1638년 교리·장령 등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경서에 정통하였고, 음양과 지리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역학에 뛰어났다.
[저술 및 작품]
『천묵재유고(天黙齋遺稿)』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남원의 요계서원(蓼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신독재 김집이 묘갈명을 짓고, 동춘 송준길이 비문을 썼으며, 도암 이재가 묘지를 지었다. 1756년(영조 32)에 홍문관부제학의 증직을 내리고, 제관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