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5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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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玉山齋- |
영어음역 | Oksanjae Teo |
영어의미역 | Oksanjae Village School |
이칭/별칭 | 옥산서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찬용 |
성격 | 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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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790년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 호곡마을이라는 향촌 사회를 근거지로 하여 설립된 사립 초등 교육 기관.
[개설]
옥산재(玉山齋)는 1790년(정조 14)에 호곡리에서 죽산박씨(竹山朴氏) 가문의 박규형과 마을 유지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주로 『사자소학』과 사서삼경 및 『명심보감』 등의 유학을 가르쳤다.
[변천]
옥산재(玉山齋)는 오랜 전통의 촌합형 서당으로 당시 남원도호부 수지방의 사립 초등 교육 기관이었다. 옥산재가 위치한 내호곡마을은 약 600년 전 죽산박씨(竹山朴氏)가 마을에 터를 잡아 정착한 마을로서, 산수가 수려하여 많은 선비들의 심신 휴양 및 학문 교류의 장소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었다.
옥산재의 설립 이후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 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초기 훈장이었던 박규형의 노고가 지대하였다. 옥산재는 조선 후기까지 국가 공신인 박규서와 박문현 등을 배출하여 학식이 높은 인재 양성소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옥산재의 활약은 그 후에도 지역 사회에서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특히 내호곡 마을에 처음 정착한 고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박문수의 후손 박시채가 아들 4형제와 함께 내호곡마을로 이주하면서 박문수의 사당을 지었다.
이에 따라 선조와 국가에 대한 충절과 긍지를 기리는 명문가의 맥을 잇게 되면서 주변 여러 방과 더불어 수지방 내의 각 마을에 서당이 계속 건립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현황]
옥산재는 현재 터만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옥산재는 인성 교육과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한 향촌 초등 교육을 담당하였다. 특히 옥산재가 향촌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많은 후학을 배출하여 현재의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일대를 전국적인 교육의 명소로 발돋움시켰다. 또한 학문과 문화 예술의 현장으로 자리 잡는 데 가교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