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6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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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烈祠 |
영어음역 | Chungnyeolsa |
영어의미역 | Chungnyeol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636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찬용 |
성격 |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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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팔작지붕 양식 |
건립시기/일시 | 1612년 |
정면칸수 | 5칸 |
측면칸수 | 3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636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사당.
[변천]
충렬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하여 접반사 정기원, 남원부사 임현, 조방장 김경노 4충신을 봉안하고 제사드릴 목적으로 1612년에 설립되었다.
곧이어 별장 신호, 통판 이덕회, 구례현감 이원춘 3충신이 추가 봉안되어 7충신의 위패를 봉안하며 제사드리는 사당으로 개편되었다. 1653년(효종 4)에는 충렬사가 사액 사당이 되었다.
충렬사는 원래 남원 용성관 동쪽에 사우(祠宇)가 건립되어 있었으나 1675년 남원부가 번화해 충렬사 주변이 시끄러워지자 남원부사 한성보와 순창군수 송시걸에 의해 만인의총 근처로 이전되었다. 이전되는 과정에서 정유재란 당시 함께 순직한 방어사 오응정을 추가로 봉안하여 제향 대상이 8충신으로 확대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잠시 훼철되었으나 1879년(고종 16)에 지역 유지들의 노력으로 다시 단을 세우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제향 행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다시 충렬사의 제단이 파괴되고, 재산을 압수당했으며, 제향마저 금지당했다. 해방 이후에야 충렬사 사우가 중건되고 제향을 다시 하게 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1960년대 들어 충렬사 부근이 주택 번화가로 변모하자, 1964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이장 검토 지시와 함께 1971년 만인의총 정화 사업이 이루어져 충렬사 역시 1979년 현재의 위치에서 터를 잡고 50명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남원 최대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형태]
충렬사는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팔작지붕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형태는 사우 3칸, 신문 1칸, 동서 협문 각 1칸, 강당 5칸, 제기고 1칸, 주옥 4칸, 유사방 2칸, 말루 3칸, 마구 3칸, 대문 1칸 등의 시설이 있는 사당이었다.
[현황]
현재 남원향교의 유림들이 충렬사에서 매년 9월 26일에 만인의사 순의제향(殉義祭享)을 드리면서 그 숭고한 뜻을 지역민과 함께 기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충렬사는 역사 교육의 살아 있는 성지에 위치한 시설로서, 남원의 자랑스런 문화 유산이자 민족의 유산으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외침을 맞이하여 당당하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남원부 백성들의 구국 충절과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존심을 지킨 남원인들의 초연함을 기리면서 만인 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제향 시설로서 현대까지도 전국의 많은 제향 시설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따라서 남원성 전투를 통해 산화한 민관군 만여 명의 숭고한 뜻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외침에 굴복하지 않았던 남원 지역 선조들의 삶을 배우고 미래의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매개체로서 충렬사는 앞으로도 길이 보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