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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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子良 |
영어음역 | Park Jaryang |
이칭/별칭 | 행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강정만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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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
성별 | 남 |
생년 | 1381년 |
본관 | 죽산 |
대표관직 | 한성판윤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활동사항]
박자량은 어린 시절부터 재주가 비범하여 마을 아이들과 놀 때에도 경사에 있는 말을 외워 모두를 놀라게 했다. 또한 『주역(周易)』을 연구하여 천문과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사서삼경과 『육도삼략(六韜三略)』을 통독하여, 독서를 시작하면 침식을 잊었다.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판윤을 지냈고, 이어서 전라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곧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초리에 와서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즐겼다.
이 무렵 조정은 정종과 태종 간에 골육상잔의 참사가 벌어졌고, 이를 목격한 박자량은 벼슬에 애착을 잃고 향리로 돌아간 것이다. 뜰에다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어 행촌(杏村)이라 자호하였다.
비록 벼슬은 떠났으나 국가에 충성된 마음은 변함이 없어 후원에 단을 쌓아놓고 날마다 북쪽을 바라보고 절하며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선조들의 제사나 가족들의 생일에는 반드시 7일간 목욕재계하여 정성껏 차례를 올렸다.
후손들은 오늘날 죽산박씨가 번성한 것이 박자량이 공을 쌓은 덕이라고 여기고 있다. 한편 고향인 초리 남산 모퉁이에 명륜당과 화락당을 지어, 매월 초하루 향당의 자제들과 친지 후학들을 불러 도의를 강하여 향약을 준수하되 착한 일은 권고하고, 악한 일은 꾸짖어 미풍양속을 기르는 데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