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증 고전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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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朴增 古典文學
영어음역 Park Jeung’s Classic Literatur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단행본, 필사본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조선 전기
집필자 박철희
[정의] 충청남도 논산 출신의 조선전기 처사 박증 고전문학.
[편찬/발간 경위]
「암천선생실기(巖川先生實記)」는 박증(朴增, 1461~1517)의 한시 6수를 포함하여 암천공 관련 유문 사적 50여 편을 묶어 송래희(宋來熙) 서(序), 박준(朴?)의 발(跋)로 1849년 무안박씨노성파 족보청에서 간행하였다.
「무안박씨가장록(務安朴氏家藏錄)」은 박증이 은거할 당시(1492년) 풍양 큰집 사우에서 등서하여 소지하고 내려온 것으로 그 안에 등재된 시조와 한시 2수가 있다. 한시 「화서산채미가(和西山採薇歌)」는 두 참고문헌에 게재되어 있으나 실기에는 끝 2소절(14자)이 누락된 사실이 가장록에서 확인된다.
[서지적 상황]
「암천선생실기(巖川先生實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권 1책으로 144면이며, 33.5×20.5㎝의 목판본이다.「무안박씨가장록(務安朴氏家藏錄)」: 김영한(金英漢) 옹의 소장자료로 275×25㎝의 긴 두루마리 필사본이다. 이 가장록에는 신라박씨 시조부터 완산(전주)박씨, 무안박씨 박증까지 51세의 세계와 박증 유묵2점, 박증 부친까지의 13세의 관직이력약기 및 가장록사실기가 게재되어 있다.
[구성/내용]
바깥세상과 일체의 서신을 끊고 은둔했기 때문에 남긴 문학작품이 시조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1수와 칠언절구「영암천(詠巖川)」, 칠언율시 「방외택연산한양촌유허운(訪外宅連山漢陽村遺墟韻)」,「방외택홍주노은동유허운(訪外宅洪州魯隱洞遺墟韻)」, 오언절구「영국(詠菊)」, 장단구「보길야은황화제백이문(步吉冶隱黃花祭伯夷文)」,「화서산채미가(和西山採薇歌)」 한시 6수가『암천선생실기(巖川先生實記)』와『무안박씨가장록(務安朴氏家藏錄)』에 전하고 있다.
외가에 대한 애상을 읊은「訪外宅遺墟韻(방외택유허운)」두 수 중 노은동 외가를 방문한 시는 아래와 같다.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성삼문의 집안은 멸문의 화를 당했다. 자손이 없는 성삼문의 집안은 적막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유일한 혈손인 암천의 어머니는 친정을 생각하면 항상 침석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였다. 부친이 참화를 당한 일은 차치하더라도 가문을 이어갈 자손이 없다는 사실은 더할 수 없는 아픔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친가를 돌볼 자손이 없는데다가 출가외인인 여자의 몸으로 자신마저 멀리 홍성까지 다녀올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모부인은 아들 암천을 시켜 항상 외가에 다녀오도록 하였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아픔을 잘 알고 있는 암천은 뜻을 받들어 항상 서울에서 외가를 왕래하며 돌보았다. 암천은 외가를 다녀온 감회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魯隱遺墟寔外鄕 노은은 외갓집 옛터인데,
承奉親命往來常 부모 분부 받들어 언제나 오가네.
荒園漠漠蓬蒿地 거친 정원 무성한 쑥밭이 되고,
故址油油禾黍場 옛 집터 벼 기장만 기름지네.
忍見慈堂生長所 차마 어머니 자라난 곳 바라볼 수 있을까,
只餘外考釣遊塘 다만 외조부 낚시하던 연못만 남아있네.
三周哀省遲遲去 삼년 만에 더딘 걸음으로 슬피 살피니,
簫殺白楊古墓傍 오래된 무덤가에 쓸쓸한 백양나무만 있네.
암천이 3년 만에 다시 홍성을 다녀온 시기는 1480년 중반으로 짐작된다. 그 후 부모가 각각 돌아가셨을 때는 연이은 상기를 마치느라 3년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혹은 은둔할 때 홍성과 연산을 동시에 다녀오고 외조부 제삿날 연산은 매년 방문하고, 홍성은 멀기 때문에 3년마다 방문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성삼문은 연산현 한양촌에 별업을 마련하고 청소년 시절 공부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후세에 우암 송시열을 주축으로 성삼문의 풍의를 존모하던 사림들이 유허비를 세웠다. 그러나 암천이 살았던 당시에는 성삼문 부자의 가산이 모두 적몰되어 충훈부에 귀속되었다. 연산에 있는 고택도 몰수당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암천은 연산 대명산 아래 한양촌에 있는 외조부 유지를 방문하고 다시 한 번 외가의 불행에 대해 애달파 하였다.
大明山下漢陽村 대명산 아래 한양촌에,
外宅遺墟幸尙存 외가의 옛터 아직도 남아 있네.
世事?騰誠有數 세상일 엎치락뒤치락 진정 운수가 있다지만,
家聲寂寞永無孫 집안 명성 적막해져 영원히 자손조차 없네.
凄凉古木如相守 고목만 처량하게 지키는 듯하고,
嗚咽寒溪只自喧 차디찬 시냇물만 시끄럽게 오열하네.
丙子後來追感淚 병자년 이후에 와서 추도의 눈물지으며,
年年一度訪墟園 해마다 한번 빈터를 찾네.
이곳은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암천이 은거 이후 해마다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암천이 지향하였던 세계는 강호에 은둔하여 유유자적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부모의 3년 상을 마친 뒤에 이복형과 친동생들에게 “인생에 귀중한 것은 자기 뜻에 맞도록 하는 것이다.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며 산림에서 소요하는 것이 나의 본디 뜻이다”라고 말한 후 갈건과 명아주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갔다. 전에 두 외가를 오갈 때 눈여겨보았던 계룡산 아래에 낚시 드리울 곳을 얻었는데 구곡의 맑은 시냇물에 10길이나 되는 큰 바위 아래였다. 이곳에서 그는 날마다 학과 어울리고 초동들과 섞이어 낚시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이러한 강호의 즐거움을「영암천(詠巖川)」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巖上靑山巖下川 바위 위에 푸른 산 바위 아래 시내이니,
非人間處洞中天 골짜기가 별천지일세.
嚴陵幽興陶潛趣 엄자릉 도연명의 그윽한 흥취를,
收載寒江獨釣船 거두어 찬 강 외로운 낚시 배에 실었네.
청산과 맑은 시내로 둘러싸인 골짜기는 신선세계와 다를 바 없는 별천지이다. 그 속에서 노닐고 있는 암천의 흥취는 옛 은둔군자인 도연명이나 엄자릉과 같은 경지이다.
강호에 누워 자연과 함께 지내는 암천의 모습은 세상의 부귀공명을 탐하거나 시비를 따지는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자연과 함께 즐기면서 자신의 지조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다음「영국(詠菊)」시에서 이러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愛渠霜下傑 너를 사랑함은 서리에도 걸출하고,
持節歲寒中 추운 겨울에도 절개를 지닌 때문이라.
對酌花開夕 활짝 꽃핀 저녁에 대작을 하니,
如逢栗里翁 마치 도연명 만난 듯하네.
암천이 국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차가운 서리에도 굽히지 않는 절개 때문이다. 그런 국화를 마주 대하고 암천은 곧바로 도연명을 떠올리고 있다.
암천은「화서산채미가(和西山採薇歌)」에서 백이숙제의 채미가에 대해 화답하면서 무왕에 대한 비판과 은나라 쇠함을 슬퍼한 사실에 대해 비판했다.
望彼西山兮 저 서산을 바라보며,
?其薇矣 고사리를 읊었는데.
起曠感于千載兮 천년의 뒤에도 큰 감회 일어나지만,
可不尙友同歸矣 나아가 벗하며 함께 돌아가지는 않으리.
懷葛軒羲已遠兮 생각건대 옛 성현은 이미 멀어졌으니,
自忘是與非矣 스스로 옳고 그름 잊겠네.
寧歿身而無悔兮 차라리 죽어도 후회가 없을지언정,
余不悲命之衰矣 나는 운명이 쇠함을 슬퍼하지 않으리.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암천은 고사리를 캐먹다 죽은 백이숙제의 절의가 천년 뒤에도 감회를 일으키지만 백이숙제처럼 행동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세상에 성현의 도의가 멀어졌으니 자신은 세상에 대한 시비를 아예 잃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백이숙제가 무왕이 폭력으로 폭력을 제거한데 대해 비판한데에 대해 암천은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조차 시비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사람들은 야은 길재의 절의를 백이숙제에 비유할 뿐만 아니라 길재 자신도 스스로 백이숙제에 비유를 하였다. 암천은 길재의 절의를 칭찬하며 자신의 생각을 붙였다. 「보길야은황화제백이문(步吉冶隱黃花祭伯夷文)」를 보면 암천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人是伯夷 사람도 백이요, 花是伯夷 꽃도 백이이네.
伯夷之後 백이의 뒤에,
又有伯夷 또한 백이 있으니.
我爲伯夷之悲辭 내가 백이를 위해 슬퍼하는 글을 지어,
以寓夙昔之幽懷 옛날의 마음속 깊이 품은 생각 붙이네.
여기서 사람이란 길재를 가리킨다. 길재는 스승인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암살당하고 고려 또한 망하자 일생동안 강호에 은거하며 절의를 굳건하게 지킨 인물이다. 국화는 사군자 중 하나로 오상지절이라 일컬어진다. 길재가 국화를 백이에게 바치는 의미는 곧 백이숙제의 풍모를 존숭하는 의미이다. 암천 또한 이러한 길재의 글을 보고 길재와 국화를 백이에 비유하면서 절의를 칭찬한 것이다.
백이에서 길재로, 길재에서 암천에게 이어지는 선이 시간적으로 수천 년에서 백여 년의 차이가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중국의 은에서 주로, 동국의 고려에서 조선, 단종에서 세조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이 셋은 세상을 버리고 강호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암천이 말한 “마음 속 깊이 품은 생각”이란 어떠한 생각인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는 곧 세상과 뜻이 맞지 않으므로 시비를 초월하고 강호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온전하게 지키면서 고고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대한 깊은 성찰에 대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암천은 동학사 외조부의 초혼각이 있는 계룡산이 눈앞에 매일보이고, 연산 대명산 아래 한양촌이 반나절 거리에 가까이 있으며, 홍성 외가도 크게 멀지 않은 대천 상류 암천구곡에 은둔하는 이유는 말하지 않더라도 알만하다. 성삼문의 충절을 흠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암천의 시세계에 나타난 정신은 외가에 대한 애상⋅절의정신⋅강호에서의 즐거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세계를 형성하는 데는 암천의 개인적인 취향도 크겠거니와 외조부인 성삼문의 영향이 매우 깊다고 하겠다. 또한 선조들의 청신한 의리정신도과 김시습 남효온 등 사류들의 절의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외조부의 충절 정신을 존숭한 암천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에서 강호에 은둔하여 세속의 부귀공명과 시비를 초탈하고 자신의 지존을 고고하게 지켜 나가고자 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암천의 문학에 나타나는 정신은 오늘날 물욕과 부귀를 쫓아다니는 많은 세인들에게 귀감이 된다.
[참고문헌]
박증, 윤원거 외,『암천선생실기(巖川先生實記)』(무안박씨족보청, 1849)
강성복, 박철희, 『암천 박증과 모곡서원』 (암천정신연구소, 2003)
『암천 박증의 도학정신과 유물유적』 (충남대학교유학연구소)
이향배,『암천 박증의 도학정신과 유물 유적』, “암천 박증의 문학정신” PP.175-195(충남대학교유학연구소, 2005)
[관련항목]
• 박증 • 박증 묘소 • 박증 묘표 • 학당리
• 성삼문 • 충곡서원 • 성삼문 유허지 • 충곡리(한양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