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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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煌 |
영어음역 | Yun Hwang |
이칭/별칭 | 덕요(德耀),팔송(八松),노곡(魯谷),문정(文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연숙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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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
성별 | 남 |
생년 | 1571년 |
몰년 | 1639년 |
본관 | 파평 |
대표관직 | 병조좌랑|예조좌랑|예조정랑|북청판관|길주목사|안변부사|대사간|이조참의 |
[정의]
조선 중기 논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노곡(魯谷). 아버지는 윤창세이며, 장인은 성혼이다. 슬하에 8형제를 두었는데 후손들이 매우 번성하여 14명의 대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윤순거·윤문거·윤선거·윤증 등 호서 유림의 큰 줄기를 이룬 이들이 모두 이 가계에서 나왔다.
[활동사항]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1599년 주서로 입시한 뒤 군자감첨정·성균관전적을 거쳐 1601년에 감찰이 되었다가 곧 정언으로 옮겼다. 홍문관은 중요한 부서이므로 은상(恩賞)으로 사사로이 임명할 수 없다는 것과 척신의 직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후 병조·예조의 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북청판관으로 나갔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북청판관으로 성가한 자제를 거느리고 관아에 머물고 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며,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시골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길주목사·안변부사·사성·승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5년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때 전란으로 어려워진 백성의 구급책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이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묘호란 때와 같이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집의 채유후(蔡裕後), 부제학 전식(全湜)의 탄핵을 받았는데 특히 전식은 그가 부의(浮議)로 오국(誤國)한 죄를 청하자, 인조 또한 “부박(浮薄)한 풍습은 통렬히 징치하지 않을 수 없어 이에 죄를 정한다.” 하여,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풀려난 뒤 생을 마쳤다. 윤황은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었다는 평을 들었다.
[학문과 사상]
서울에서 유학하면서 당대의 명유인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수학하여 학자적 자질을 인정받았다. 특히 성혼의 사위가 되면서 그의 학통을 계승하는 수제자가 되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화(主和)를 반대,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 주화론자의 유배를 청하고, 항장(降將)을 참할 것을 주장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저술 및 작품]
1866년(고종 3)에 9세 종손 윤상작(相爵) 등이 윤황의 상소문집인 『팔송봉사(八松封事)』를 편집·간행하였다.
[묘소]
묘소는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에 있다. 묘비는 1660년경에 건립되었으며 김상헌(金尙憲)이 비문을 지었고, 아들인 윤순거(尹舜擧)가 글씨를 썼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영광의 용계사우(龍溪祠宇),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