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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985
한자 金昌翕
이칭/별칭 자익(子益), 삼연(三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3년연표보기 - 김창흡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73년 - 김창흡 진사시 1등 합격
몰년 시기/일시 1722년연표보기 - 김창흡 사망
출생지 김창흡 출생지 -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김창흡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사당|배향지 석실 서원 -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
사당|배향지 미원 서원 - 경기도 양평군
사당|배향지 충곡사 - 덕원
사당|배향지 신계사 - 경상북도 울진군
사당|배향지 서암사 - 강원도 양구군
사당|배향지 호해정 영당 - 강원도 강릉시
사당|배향지 요산 영당 - 경기도 포천시
사당|배향지 독충당 - 서울특별시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안동(安東)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어머니는 해주 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인 안정 나씨(安定羅氏)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지돈령부사 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이 형이다.

[활동 사항]

김창흡(金昌翕)[1653~ 1722]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호방하고 인품이 뛰어났다.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고 큰 뜻이 있어 부귀와 분화(紛華)한 것은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하였다. 형들과 함께 이단상(李端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73년(현종 14) 아버지의 명에 따라 진사시에 응시하여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이후에는 과거에 발길을 끊었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雒誦樓)를 세우고 독서를 하며 산수를 즐겼다.

1687년(숙종 7) 우의정 김석주(金錫冑)김창흡의 문장과 탁월한 품행을 보고 조정에 천거하여 1684년(숙종 10) 장악원 주부를 제수 받고, 1696년 (숙종 22) 서연관(書筵官)에 선발되었다. 1715년(숙종 41)에는 사헌부 지평을 제수 받았고, 경종 초에는 집의(執義)와 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으나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명산을 좋아하여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산수를 즐겼다.

일찍이 천마산과 금강산을 구경하고 강화도 적석사(積石寺)에 들어가 글을 읽었으며, 다시 속리산과 백마강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1674년(현종 15) 평양을 유람하고 이듬해에는 인제군 한계령을 답사하고, 그해 10월 월출산과 죽촌정(竹村亭)을 돌아보며 많은 시를 남겼다. 1676년(숙종 2) 둘째 형 김창협과 같이 중흥사(重興寺)를 찾아가 한동안 그곳에서 독서를 하였다. 1679년(숙종 5) 철원군 용화사(龍華寺)에 우거하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삼부연(三釜淵)의 절경에 매료되기도 하였다. 훗날 호를 ‘삼연’이라 한 것도 이 삼부연의 경치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1684년(숙종 10) 춘천의 청평산 운곡(雲谷)을 거쳐 다시 삼부연을 찾았고, 그 이듬해 다시 금강산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1686년(숙종 12) 한강 상류의 저자도(楮子島)에 정자를 지었는데, 이는 아버지의 노후를 생각해서였다고 한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유배되자 유배지인 전라남도 진도까지 배종하였으며, 2개월 후 아버지가 사사되자 운구하여 경기도 양주 율북리 운곡에 장사지내고, 궤연(几筵)을 김창협이 살고 있는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로 옮겼다.

1698년(숙종 24) 큰형인 김창집이 강화 유수로 임명되자 강화 마니산을 돌아보고 양평의 벽계로 돌아왔다. 1716년(숙종 42) 파주 금촌을 거쳐 영평[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지역]의 원통사(圓通寺)와 곡구정(谷口亭)을 방문하고 보개산 영은암(靈隱庵)에서 문생들을 강학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창흡은 성리학에 밝고 시작(詩作) 또한 뛰어났는데, 형인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이기설에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김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즉, 선한 정(情)이 맑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고 선한 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말한 김창협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또한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는 이(理)를 좌우로 갈라 쌍관(雙關)으로 설명한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고, 표리(表裏)로 나누어 일관(一關)으로 설명한 이이의 주장에 찬성하였다. 그는 『중용(中庸)』의 미발(未發)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또한 인품(人品)을 6등으로 나누어 성인(聖人)·대현(大賢)·군자(君子)·선인(善人)·속인(俗人)·소인(小人)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삼연집(三淵集)』, 『심양 일기(瀋陽日記)』 등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양주의 석실 서원(石室書院), 양근의 미원 서원(迷源書院), 덕원의 충곡사, 울진의 신계사(新溪祠), 양구의 서암사(書巖祠), 강릉의 호해정 영당(湖海亭影堂), 포천의 요산 영당(堯山影堂), 한성의 독충당(篤忠堂)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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