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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203
한자 崔勉植
이칭/별칭 경소(敬紹),염제(念齊)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980년 - 최면식 건국 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최면식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몰년 시기/일시 1941년 07월 03일연표보기 - 최면식 사망
출생 시기/일시 1891년 1월 7일연표보기 - 최면식 출생
출생지 최면식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활동지 최면식 활동지 - 만주
공적비 독립지사 염재최 선생 공적비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678
사당 채산사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678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 광복회원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포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자는 경소(敬紹), 호는 염재(念齋). 할아버지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고, 아버지는 최영학(崔永學)이다.

[활동 사항]

최면식(崔勉植)[1891~1943]은 1891년 1월 7일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현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다. 면암 최익현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항일 정신이 강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1912년 9월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단(光復團)에서 활동하던 중 국내 조직 연락의 책임을 맡고 밀입국하였다. 그 뒤 1914년 만주로 돌아간 뒤에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입국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5년 일제의 철저한 감시로 군자금 조달이 어렵게 되자, 자신의 문전옥답(門前沃畓) 6,611㎡[2,000평]을 모두 팔아 기호 지방의 광복단 조직에 힘썼다. 그 뒤 1916년 만주로 건너가서 1917년 김좌진(金佐鎭)·노백린(盧伯麟)·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이끄는 대한 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 광복회는 1915년 풍기 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 단체였다.

최면식은 이병호(李秉昊)와 함께 전라도 지역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에 힘을 쏟았고, 친일 부호 처단에 필요한 무기를 채기중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초 대한 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되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한 광복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1921년 9월 대전 경찰서에 체포되어 무기 징역을 선고 받고 공주 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병이 악화되어 반신불수가 된 상태에서 출옥하였다.

1925년 이후 고문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몸이 자유롭지 못하여 서울 성동구 왕십리와 동대문구 신설동 등지에 은거하며 국내 독립 단체의 연락처로 제공하기도 하고, 상경하는 청년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특히 독립투사 비밀 기술원에서 의술을 배워 한약방을 개설해 어려운 주민들을 무료로 치료하였다. 그러나 모진 옥고로 건강을 잃어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1년 7월 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0년 건국 포장,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또한 1982년 최면식 선생 공적비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678번지에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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