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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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朝鮮-,恭讓王陵-濬慶墓·永慶墓 |
영어공식명칭 | Royal Tomb of King Gongyang and Junkyungmyo, Youngkyungmyo - The End of Goryeo Dynasty and Beginning of Choseon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배재홍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394년 - 공양왕릉 조성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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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99년 4월 - 목조 부모의 묘로 인정되면서 준경묘·영경묘로 추봉 |
궁촌 공양왕릉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78 | |
준경묘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준경길 333-360 | |
영경묘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영경로 270 |
[정의]
강원도 삼척 지역은 공양왕이 피살됨으로써 고려가 멸망한 곳이며, 조선 건국을 암시한 태조이성계의 5대조 묘가 있는 지역.
[개설]
강원도 삼척지역은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의 묘한 인연이 만나는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이곳 삼척에서 살해[공양왕의 사망과 관련하여서는 교살설(絞殺說)과 사사설(賜死說)이 전해진다.]하였다. 이성계는 1394년(태조 3) 3월 간성에 유배되어 있던 폐왕(廢王) 공양왕과 아우 우(瑀), 외아들 석(奭)을 삼척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며 그해 4월 공양왕 등 세 사람을 지금의 삼척시 근덕면 궁촌에서 살해하였다. 이처럼 삼척은 고려의 역사가 마침표를 찍은 곳이다.
삼척은 또한 조선의 건국이 시작된 곳이다. 전라도 전주의 유력한 토착 세력이던 이성계의 4대조 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1274]는 관기(官妓) 문제로 170여 호의 자기 세력을 거느리고 전주를 떠나 지금의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일대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전주를 떠나 함경도 의주로 이주하기까지 약 17년 동안 삼척에 거주하였다. 이안사가 삼척에 머무르는 동안 그의 부모인 이양무(李陽茂)[?~1231] 부부 모두가 사망하게 되자 이곳에 장사를 지냈다. 이것이 바로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이다. 준경묘와 영경묘 자리는 5대 안에 왕(王)이 출생하여 이 나라를 제압하고 창업주가 될 명당(明堂)으로 알려져 있다. 즉 태조이성계가 왕이 되어 조선을 건국할 기반이 바로 삼척에 있는 준경묘와 영경묘가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조선의 시작]
삼척은 조선이 시작된 곳이다. 전주의 유력한 토착 세력이던 이성계의 4대조 목조이안사는 전주 산성별감(山城別監)과 관기 문제로 불화가 생겼다. 이 문제 때문에 이안사는 170여 호의 자기 세력을 거느리고 1236년(고종 23) 가을 무렵 전주를 떠나 이듬해 봄 삼척에 도착하여 지금의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일대에 정착하였다.
이안사는 약 17년 동안 삼척에 머무르는 동안 평창 이씨인 효공왕후(孝恭王后)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효공왕후의 모친 돌산군부인(突山郡夫人) 정씨는 삼척을 본관으로 하는 김인궤(金仁軌)[?~?]의 외손녀였다. 이에 따라서 삼척은 이안사의 장모인 돌산군 정씨의 외향이자 효공왕후의 외외향(外外鄕)인 셈이다. 조선태조이성계가 1393년(태조 2)에 삼척을 이와 같은 인연에 따라 삼척부(三陟府)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하였다. 이 홍서대는 삼척 김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 이안사가 삼척에 머무르는 동안에 그의 부모인 이양무 부부가 모두 사망함으로써 이곳 삼척에 장사를 지냈다. 이때 이들 부모를 안장한 곳이 바로 준경묘와 영경묘이다. 지금 삼척에는 이안사 아버지 이양무의 장례와 관련하여 소 100마리와 황금관을 제물로 쓰면 자손에서 왕이 나온다는 ‘백우금관(白牛金棺)’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백우금관의 전설]
목조 이안사가 부친 이양무의 상을 당하여 묘터를 구하려고 사방을 헤매다가 노동(蘆洞)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한 도승이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선 주위를 두루 살펴보고 나서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혼자말로 ‘참 좋구나. 대지(大地)로다’라고 하였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도승은 계속해서 ‘개토제(開土祭)에 소 100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관(棺)을 금으로 만들어서 장사를 지내면 5대(代) 이내에 왕이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제압하고 창업주가 될 명당이로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 말을 들은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지만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100마리와 금관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마침내 궁리를 찾아내었다. 소 100마리는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이 황금색이니 이것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마침 처가에 흰 소가 있었다.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기 때문에 숫자상 일 백 백(百) 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부인에게 내일 밭갈이를 하려고 하니 처가의 흰 소를 잠시 빌려 오라고 하였다. 이튿날 부인이 친정에 가서 흰 소를 몰고 오자 이 소를 노동으로 몰고 가서 잡은 뒤 제물(祭物)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황금색 귀리 짚으로 관을 만들어서 장사를 지냈다. 이렇게 장례를 치른 후 이양무의 5대손인 이성계가 마침내 왕이 되어 조선을 건국하였다.
[준경묘와 영경묘]
현재 목조의 아버지 이양무의 묘인 준경묘는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고, 어머니의 무덤인 영경묘는 삼척시 미로면 영경로 270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준경묘와 영경묘가 조선 건국 당시부터 목조 부모의 묘로 공식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 두 묘가 목조 부모의 묘로 공식 인정되고 준경묘와 영경묘로 추봉(追封)된 때는 1899년(고종 36)이다.
목조의 부모가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한 후에 삼척에서 사망하여 장사를 지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목조가 삼척에 정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의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삼척에 있는 목조 부모의 묘는 잃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후대 왕들은 목조 부모의 묘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노동, 동산(東山)의 두 묘[현재의 준경묘․영경묘]가 이미 태조대에 목조 부모의 묘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이성계는 국제(國制)를 지내고 수호군(守護軍)을 두었다. 그러나 노동과 동산의 두 묘가 목조 부모의 묘가 확실하다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태조 이후에는 계속 근본과 관련된 의문이 제기됨에 따라 공식 국릉(國陵)으로 추봉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서 때때로 봉심(奉審)[임금의 명으로 능이나 묘를 돌보는 일]하고 수호군을 두기는 하였지만 봉축(封築)도 하지 않았으며, 향사(享祀) 등 전례(典禮)도 거행하지 않았다.
선조 이후에는 목조 부모의 묘가 태백산황지(黃池) 부근에 있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어 인조대에는 대규모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 숙종대에는 목조 부모의 묘가 삼척부 남쪽 위천(葦川) 부근에 있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조 이후 황지 부근 위치설, 위천 부근 위치설 등과 같은 이설(異說)이 수그러들자 다시 노동과 동산의 두 묘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특히 고종대에 들어와 전주 이씨 종친들이 두 묘의 관리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노동, 동산의 두 묘가 마침내 1899년 4월에 목조 부모의 묘로 공식 인정되면서 준경묘와 영경묘로 추봉되었다.
준경묘의 형국은 신선이 모여 있는 형인 선인취회형(仙人聚會形)이다. 준경묘에서 보면 좌우의 상상산과 상장산이 앞을 가려서 안산(案山)과 조산(祖山)을 볼 수가 없다. 이는 혈(穴)의 방향이 두 산 사이의 낮은 곳을 향해 나 있어 안산과 조산이 그 너머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혈의 역량이 이곳처럼 워낙 거대한 곳에서는 사소한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목조가 머물러 있던 옛 집터 황기(皇基)는 현재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이다. 집터에는 집은 없고 이안사가 살던 집터임을 표시해 주는 비각 안의 비석만이 세월을 지키고 있다. 1899년 4월에 목조 부모의 묘를 공식 인정하고 준경묘와 영경묘로 추봉하여 대규모 정비를 할 때 함께 집터임을 알리는 비석도 세웠다. 비석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가 새겨져 있다.
영경묘는 여러 면에서 준경묘와 대비된다. 준경묘가 크고 당당한 남성의 맛이 있다면 영경묘는 작고 아담한 여성의 멋이 풍긴다. 축대도 큰 돌을 깨어서 만들어진 각돌로 쌓은 준경묘와 달리 영경묘는 하천이 가까워서 동글동글한 냇돌로 쌓았다. 주변의 소나무를 보아도 준경묘의 소나무가 웅대한 남성의 미를 과시하고 있다면 영경묘의 소나무는 늘씬하지만 아리따운 여성의 미를 뽐내고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고려 왕조는 조선 왕조가 시작된 삼척에서 끝났다. 즉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이 삼척에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일파에게 살해됨으로써 고려의 국운은 삼척에서 끝을 맺었다. 고려 왕조 마지막 왕인 34대 공양왕은 비운의 왕이었다. 공양왕은 고려 말 새 왕조를 세우려는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위에 올랐으며, 왕위에 올라서도 꼭두각시 왕에 지나지 않았다.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뒤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진짜 왕씨 왕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20대 신종의 7대손인 왕요를 왕위[공양왕]에 올렸다. 그러나 공양왕은 재위 4년 만에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태조 1)에 조선을 건국하고 나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원주로 유배하면서 직위를 왕(王)에서 군(君)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간성으로 이배(移配)시키더니 1394년(태조 3) 3월 간성에 유배되어 있던 폐왕 공양왕을 비롯하여 그의 아우 및 아들 등 세 명을 삼척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래현령 김가행(金可行)[?~1394]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1394] 등이 공양왕과 그 친속(親屬)의 명운(命運)을 맹인 점쟁이 이흥무(李興茂)[?~1394]에게 점친 것을 계기로 반역을 도모한다고 하여 그 해 4월 중추원부사 정남진(鄭南晉)[?~1410] 및 형조전서 함부림(咸傅霖)[1360~1410]을 삼척으로 보내 공양왕과 그의 아우 및 아들을 살해하였다. 공양왕은 49세를 일기로 아우 우, 아들 석과 더불어 고려의 운명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어 고려의 마지막 왕을 죽인 조선은 후일 왕위를 공손하게 받들어서 물려주었다[공양(恭讓)]는 뜻에서 왕요에게 공양왕(恭讓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강원도 삼척시 궁촌의 공양왕릉]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宮村)에는 공양왕릉이 있다. 궁촌이라는 이름은 공양왕이 이곳으로 유배를 와 살던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간성에서 이배되어 온 공양왕이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이곳 사람들의 공양왕에 대한 추모의 정(情)은 남다르다. 이 같은 주민의 마음은 공양왕과 관련된 전설을 만들었다. 공양왕이 살 때 동(銅)으로 된 문(門)을 세운 고개를 동현(銅峴)이라 하고, 공양왕이 살해된 고개를 ‘살해재’가 변한 ‘사라치’라고 부른다. 특히 사라치에는 지금도 비가 오면 골짜기에 붉은 핏빛의 계곡물이 흐른다고 믿고 있다.
국도에서 바닷가 쪽 산등성이의 양지바른 곳에도 공양왕릉이 있다. 이곳에 있는 무덤은 4개이다. 가장 큰 것이 공양왕의 무덤이다. 두 개는 공양왕의 아들 석과 아우 우의 무덤이다. 나머지 하나는 공양왕의 시녀 또는 공양왕이 생전에 타고 다니던 말의 무덤으로 전해진다. 아무런 석물도 없는 쓸쓸한 무덤이지만 그 크기는 왕릉의 품위를 풍길 정도로 우람하다. 공양왕릉은 오랜 세월 동안 초라한 모습으로 있다가 1837년(헌종 3)에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이 봉토를 새로 하였다. 1942년에 근덕면장 김기덕(金基悳)이 ‘고려왕릉 봉찬회’를 조직하고 왕릉에서 제향 행사를 열기 시작했다. 1977년에 공양왕릉은 큰 봉분으로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매년 궁촌 사람들에 의해 제향 행사가 열리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의 공양왕릉]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 외에 경기도 고양시에도 있다. 이 공양왕릉은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으며,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쌍분(雙墳)으로 조성된 고양시공양왕릉은 왼쪽에 있는 것이 공양왕의 능이다. 오른쪽 봉분은 공양왕 후비의 능이다. 봉분의 크기는 일반 민묘(民墓)와 별로 차이가 없지만 봉분 앞에 삼척의 공양왕릉과 달리 장명등, 석수, 비석 등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이 능이 왕릉임을 나타내고 있다. 양 능의 중간에는 조선고종 연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란 글씨가 한자로 새겨진 비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마지막 왕 왕요는 1416년(태종 16)에 공양군에서 공양왕으로 복위되었다. 이와 함께 능호(陵號)를 내려졌다. 그리고 1437년(세종 19)에는 당시 경기도 안성군청룡사(靑龍寺)에 봉안된 공양왕의 어진(御眞)을 경기도 고양현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이안(移安)하였다. 이상의 기록에서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공양왕릉이 조선 왕조가 인정하는 공식 능임을 알 수 있다.
공양왕릉이 고양시에 있는 것은 이곳이 공양왕의 후비인 순비 노씨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순비 노씨는 교하군 사람 창성군(昌城君)노진(盧稹)의 딸로, 고려가 망한 뒤 공양왕과 함께 쫓겨났다가 돌아온 뒤에 고향인 경기도 고양시에 묻혔다. 태종은 공양왕을 복위시킨 뒤 공양왕 후비의 능이 있는 고양시에 공양왕릉을 공식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척시 궁촌에 있는 공양왕릉은 삼척에서 살해된 직후 만들어진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다. 1394년 삼척궁촌에 유배 와 있던 공양왕과 그의 아우 및 아들이 함께 살해되었고, 이들을 묻은 것이 지금 삼척에 있는 공양왕릉으로 보인다. 이후 공양왕이 군(君)에서 왕(王)으로 복위되면서 경기도 고양시로 옮겨간 뒤 정식으로 능호까지 내려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