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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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집필자 | 심일종 |
[정의]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공자(孔子)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는 한편 강학(講學)과 의례를 목적으로 전승되고 있는 종교.
[개설]
우리나라의 유교 사상은 중국에서 한자(漢字)와 함께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전국(戰國)시대 말에서 한(漢)나라 초기로 추정된다. 최치원(崔致遠)[857~?]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우리나라 상고(上古)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한 가지로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순(恭順)하는 것은 공자의 취지이다.”라고 한 것에서도 유교 유입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즉 이 땅의 역사시대와 더불어 유교의 ‘효제충신(孝悌忠信)’은 우리 고유의 도덕과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해 왔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화랑, 신라통일시대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 조선의 성균관과 향교(鄕校) 등 역대 교육기관에서는 유교의 경전을 필수 항목으로 정했다. 또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지름길이던 과거제도의 시험 과목도 유교의 경전으로 삼았다. 이는 유교 사상 보급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고려 말에 유입된 주자(朱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성장한 사대부들은 조선 개국과 때를 같이하여 성리학 이념을 국시(國是)로 삼으면서 유교 사상은 조선 후기까지 일반인의 일상과 의례 생활 깊숙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즉 조선 왕조는 유교 문화 이념을 수용하여 지방 사회 질서를 유교 문화 논리에 접목시키고, 과거제 운영을 유교 교육과 연계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사회 문화의 기초 기구 기능을 담당한 것이 향교이다. 국가는 군현제 정비와 함께 지방 수령들에게 향교에 대한 관심과 적극 보호 및 육성을 촉구했으며, 이를 위한 재정도 적극 지원하였다. 이에 힘입어 향교는 지방 수령의 책임 아래 운영이 활성화되었다.
[조선시대 전기]
삼척 지역의 유교는 향교가 본산이다. 삼척향교는 1398년(조선 태조 7)에 처음 세워졌고, 1407년(태종 7) 옥서동월계곡(月桂谷)으로 이건하였다가 1468년(세조 14) 현재의 삼척시 교동으로 옮겨 왔다. 그 이전의 삼척 지역 유교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고증이 어렵다. 본래 향교는 관학(官學)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지방 자제들에게 유학의 기초 교양이 되는 경서(經書)와 제술(製述)을 교육하였다. 국가에서 지방에 학교를 설립한 사례는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그러니 고려시대에는 일부 주·현에만 지방관을 파견하는 계서(階序) 성격의 지방제도 아래에서 지방 교육기관인 향학(鄕學)도 3경 12목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만 설치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일원 성격의 군현제로 편제해서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설치하고 학전(學田)을 지급하는 등 지방 교육을 확대하였다.『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향교 교생(校生)의 정원은 부·대도호부·목 각 90명, 도호부 70명, 군 50명, 현 30명 등 전국에 걸쳐 1만 4730명에 이른다. 교관으로는 주·부에 종6품의 교수(敎授), 군·현에 종9품의 훈도(訓導)를 각각 파견하였다. 교생에게는 군역을 면제하는 특전이 주어졌다. 삼척의 향교 또한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즉 선현을 향사하는 기능과 지방의 유생(儒生)을 모아 강학(講學)하는 교육 기능을 띠었다. 동시에 향토 사회 문화를 향상시키고 향풍(鄕風)을 순화하는 사회교육의 임무도 있어서 유교 정신을 진작시키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조선 후기부터 학문 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지방의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 기구이던 서원(書院)과 문중 차원에서 운영하던 사우(祠宇)도 유교의 진작에 영향을 미쳤다. 서원·사우의 성립 배경은 조선 초부터 계속되어 온 사림의 향촌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사림들은 향촌 사회에서 자기 세력 기반 구축의 한 방법으로 일찍부터 사창제(社倉制), 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을 각자 시행하여 왔다. 특히 정계 진출이 가능해진 성종 이후에는 이를 공식화하여 국가 정책으로까지 뒷받침받고자 하였다. 삼척 지역의 대표 서원인 산양서원(山陽書院)의 사례를 통하여 삼척 유교 발전의 또 다른 추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23년(세종 5)에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한 익성공(翼成公)황희(黃喜)[1363~1452]는 이 지방에 흉년이 들자 백성 구휼에 헌신하여 삼척 지역에는 굶어죽은 자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하여 삼척도호부 백성들은 황희의 은덕을 잊지 못하여 그가 왕래하며 쉬어 간 와현(瓦峴)에 돌을 모아 대를 만들고 이를 소공대(召公臺)라고 불렀다. 1515년(중종 10)에는 무너진 소공대 자리에 소공대비를 세웠고, 나중에 삼척 사림이 소동사를 건립하였다. 1824년(순조 24)에는 홍명섭(洪明燮)·이우석(李禹錫)·민기용(閔夔鏞) 등 향중 사림이 황희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소동사(召東祠)를 창건하였고, 소동사는 1857년(철종 8)에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1861년(철종 12)에는 묘정비를 건립하였다.
[근현대 시기 ]
산양서원과 소동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제향을 지낼 수 없었지만 건물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 이후 근대에 접어들면서 대한제국도 문을 닫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유교 문화는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삼척 유림은 성현들의 제향(祭享)을 지속하였다. 산양서원은 1913년 일본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는 유림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헌병이 서원 건물을 방화함으로써 소실되었다. 1971년 묘정비 복원을 시작으로 1998년 묘정비각이 복원되었으며, 서원 안에 위치한 산양서원묘정비(山陽書院廟庭碑)는 1998년 4월 18일에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서원과 사우는 삼척향교와 더불어 성현과 선현(先賢)을 향사(享祀)하고 유생을 강학시키는 유교 문화의 중심이 된 두 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