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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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里 |
영어공식명칭 | Pyeongri |
이칭/별칭 | 뒷말,후평,조치원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주현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평리는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수원지 주변 마을과 서창1리 배수장 주변 마을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일명 후평(後坪) 또는 ‘뒷말’이라고도 불리었다.
[명칭 유래]
평리는 『추운실기(鄒雲實記)』에 의하면 청주목 서강외 일하면 장대리 지역으로, 일명 조치원으로도 불리던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장원(場院)으로 비정되며, 『동국문헌비고』(1770)의 기록대로 조치원장(4·9일)이 열리던 고장이다.
1925년 신·구 시장이 합병되기 전까지 조치원장터의 중심지이던 곳으로, 지금도 일부 지명이 남아 있다. 1914년 조치원리에 속하여 1940년 소화정(昭和町)으로 분리되었으며, 1947년 평동으로 개칭되었다가 1988년 평리로 개정되었다.
평리(平里)라는 지명은 뒷말[後坪]이라는 자연지명에서 유래하였다. 청주목 서강외일면 관할이었던 시절 동평(東坪)과 서평(西坪)의 뒤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뒷말 또는 후평(後坪)이라 불린 것으로 보인다. 뒷말과 함께 ‘나무전거리’로도 유명하였다.
[형성 및 변천]
‘구장터’라는 지명이 있다. ‘조치원’이란 지명이 기록상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청주목 읍지에 청주의 서쪽에 있던 것으로 기록된 ‘조치원장’이다. 평리는 조선시대 청주목에 편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조치원’이란 지명의 출발이 평리에 형성된 옛 시장에서 출발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구장터에 관하여 알려진 전설은 원래 늘 물이 넘쳐 냇가나 다름없는 곳인데, 제방을 쌓은 후 민가가 들어서고 장이 형성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조치원역으로 인하여 조치원은 수십 년간 교통 요지로 발전하였다. 청주, 공주 등 인근 지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하여 조치원으로 왔기 때문에 편의시설이 번성하였다.
즐비하던 술집을 비롯하여 여관도 많았다. 그중 평리에 청주여관이 있었으며, 지금도 청주여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자연환경]
평리는 읍의 동단에 있다. 동쪽은 조천, 남쪽은 상리, 서쪽은 교리, 북쪽은 내창천과 연접한 지역으로 하천 변에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 학교, 시장, 교통편의 시설과 가까워 주택가로 적합한 마을이다.
1947년에는 홍수로 금강이 범람하면서 공주 일대가 물에 잠긴 일이 있었다. 다행히 상류 지역인 조치원은 큰 피해가 없었지만 곳곳에 물이 넘쳐 고생한 기억이 전하여진다. 비만 오면 조치원 사람들은 둑이 터질까 봐 조바심을 느끼며 제방에 몰려나왔다고 한다. 매년 반복되던 홍수 걱정은 대청댐이 건설된 이후 비로소 사라지게 되었다.
[현황]
2020년 8월 기준으로 총 314가구에 60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면적은 0.136㎢이다.
평리에는 1935년부터 78년동안 정수장으로 사용된 후 폐쇄된 조치원 정수장과 담장으로 분리된 근린공원을 통합하여 조치원 문화정원을 조성하여 주민의 휴식처로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