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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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草廬歷史公園 |
영어공식명칭 | Choryeo History Park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도움1로 40[어진동 517]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연 |
준공 시기/일시 | 2015년 - 초려역사공원 준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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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갈산서원 - 공주목 삼기촌 갈산 |
현 소재지 | 초려역사공원 - 세종특별자치시 도움1로 40[어진동 517] |
성격 | 공원 |
면적 | 2만 3,700㎡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에 초려 이유태를 기리기 위하여 조성한 역사 공원.
[개설]
초려역사공원은 초려 이유태의 묘소를 복원하기 위하여 조성된 역사공원으로, 2015년에 준공되었다. 이유태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권시 등과 함께 ‘충청오현(忠淸五賢)’이라 불렸다. 이유태는 당시 사회 혼란의 근본 원인을 농민의 유리와 토지의 황폐로 판단하여 향약에 의한 향촌조직과 오가작통제의 실시, 양전 시행과 사창 설치를 주장하고 양인(良人) 이상 자제의 취학과 15세 이후 능력에 따른 사농공상의 선택을 주장하였다. 이외에도 어염세의 국고 전환과 면세전의 폐지, 내수사의 혁파, 부세 및 인역제의 개혁, 공안의 조정과 감축, 양전제의 개선, 관제의 개편과 합리적 운영방안의 마련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유태의 주장은 효종의 북벌의지 실현을 위한 만전지책(萬全之策)의 일부로 쓰여져 있으며, 현종에게 제출된 ‘기해봉사(己亥封事)’에 잘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갈산서원 역시 이유태와 송시열의 관계의 영향으로 사액을 받거나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특별자치시의 건설과 함께 이유태를 재조명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특히 충청지역 유림들의 강한 주장과 유적 복원 노력이 있었다.
[건립 경위]
초려역사공원은 초려 이유태의 묘역을 복원하기 위하여 만든 역사공원이다.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갈산서원(葛山書院)은 1694년(숙종 20)에 지역 사림들이 뜻을 모아 공주목 삼기촌 갈산에 세운 서원이다.
[변천]
초려역사공원은 LH가 준공한 뒤 2015년 11월 세종특별자치시로 관리 이관(移管)[담당을 옮김] 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는 초려역사공원을 시민 교육과 전통행사 등 시민과 함께 숨 쉬는 문화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주된 건물인 갈산서원 건물은 초려역사공원의 조성과정에서 공원 안으로 이전 복원되었다. 고향인 금산에 세워진 이유태를 기리는 금산서원(錦山書院)은 1713년 훼철(毁撤)[헐어서 치워 버림]되었다.
[구성]
갈산서원(葛山書院)[강당] 도산재[동재], 몽양재[서재], 연영문[문간재] 등의 건물과 신도비로 구성되어 있으며 발굴 공사가 진행중이다. 신도비는 너비 80㎝, 높이 120㎝, 두께 30㎝이며 비신은 너비 81㎝, 높이 208㎝, 두께 38㎝이다. 1883년 이유태의 후손이 건립하였으며, 원래 연기군 남면 종촌리에 있다가 2015년 초려역사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현황]
세종특별자치시는 2015년 이후 집현전 프로젝트와 연계해 고전학 강좌와 인문지리학교 등을 진행하고, 연중 지속적으로 서당·서예교실을 운영하여 어린이 인성교육에 힘쓰고 있다. 방학 중에는 충효교실, 선비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판소리, 국악연주회 등의 전통공연과 전래놀이, 전통혼례 등의 전통문화 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초려역사공원의 시설을 활용한 국악 강의 등 비정기적인 교육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초려의 정신을 기리는 심포지움 등이 진행되었으며 세종시문화재단이 주관이 되는 다양한 국악 공연, 서예 전시회 등이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