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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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未義兵 |
영어공식명칭 | Jeongmi Righteous Armi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상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7년 - 정미년에 의병이 일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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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시기/일시 | 1907년 8월 - 정미의병, 군대해산 |
전개 시기/일시 | 1907년 09월 03일 - 의병 100여 명은 9월 3일 소정리역을 불태우고 전의 부근으로 이동 |
전개 시기/일시 | 1907년 11월 07일 - 임대수 의진으로 보이는 의병 30여 명이 남면분파소 습격을 계획하던 중 조치원에서 추격해 온 일본 경찰대와 복룡 일대에서 전투를 벌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0년 - 임대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성격 | 사건·사고와 사회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임대수|권정남|임사일 |
[정의]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세종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의병.
[개설]
세종 지역에서는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항일의병 활동이 나타난다. 세종 지역 의병은 공주와 연기·전의의 산림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일제의 추격을 피하면서 기민한 작전으로 전과를 올렸다.
[역사적 배경]
을사조약이 늑결된 이후 의병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8월에 일제가 군대를 해산시키자 이에 항거한 군인과 의병들이 연합하여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다.
[경과]
정미년 세종 지역에 일어난 대표적인 의병 활동으로는 1907년 9월 소정리역 급습 사건을 들 수 있다. 소정리역을 습격하고 역 건물을 소각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의병 100여 명은 9월 3일 소정리역을 불태우고 전의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일제는 일본군 1개 소대를 전의로 파견하여 의병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후 세종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은 대평리 남쪽, 전의 서북쪽, 장척면 대교시장 일대, 북면 동리 등지에서 일어났다. 세종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임대수(林大洙)가 있다. 송담리 출신인 그는 권정남(權正南), 임사일(林士日)과 함께 봉기하여 연기·공주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전투로는 1907년 11월 7일 발발한 복룡전투를 들 수 있다. 임대수 의병으로 보이는 의병 30여 명이 남면분파소 습격을 계획하던 중 조치원에서 추격해 온 일본 경찰대와 복룡 일대에서 벌인 전투이다.
[결과]
일본 경찰대와 수비대는 공주 일대까지 의병을 추격하였으나 의병을 찾아내는 데 실패하였다. 임대수는 이후에도 임사일·권정남 의병대와 연합하여 전의·연기·공주는 물론 천안·청주·문의 등지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임대수 등은 1911년 6월 공주 의당면 태산리에 있는 덕천군 재실에서 은거하던 중 일본 기마대의 공격을 받고 모두 피살되었다.
[의의와 평가]
세종 지역 의병 활동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07년 이후 전개되었으며, 대규모 항전으로는 이어지지 못하였다. 세종 지역이 교통 요지였으며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대수 의병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지역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치열한 항일전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대수에게는 198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