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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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城 |
영어공식명칭 | Naseong |
이칭/별칭 | 나성리토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백영종 |
조성|건립 시기/일시 | 삼국시대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인근 금강에 접해 있는 낮은 구릉에 축조된 토축 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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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나성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101 일대 |
성격 | 토성 |
크기(높이,길이,둘레) | 약 6m[성벽 높이]|약 7m[기저부 폭]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인근 금강에 접해 있는 낮은 구릉에 축조된 삼국시대 산성.
[건립 경위]
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평지와 가까운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산성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그냥 토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백제에 대항하기 위하여 신라에서 토성을 쌓아 ‘신라 성’이라는 뜻에서 나성(羅城)이라 불리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옛 남면소재지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약 2.5㎞ 거리에 나성리 나리재마을이 있었다. 금강의 북안(北岸)에 자리하고 있던 나리재 마을의 ‘나리재’라고 하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자리한 토성이 나성리토성이다.
[형태]
토성은 표고 46m에 불과한 매우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하고 있지만 주변 지역이 미호천(美湖川)과 금강(錦江)이 만나는 곳이자 금강 주변의 넓은 평야에 해당되기 때문에 전망은 매우 좋은 편이다. 즉 성벽에 오르면 주변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벽은 전체를 토성으로 축조하였다. 특히 동벽과 북벽이 잘 남아 있다. 서벽은 성내에 밭을 경작하면서 성벽의 대부분이 붕괴된 상태이며, 남벽은 완전히 유실되었다. 남벽이 이렇게 유실된 것은 금강과 접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성내의 지형이 북고남저형(北高南低形)으로 되어 있고 현재도 출입이 남벽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어서 후대에 인위적으로 모두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동벽과 북벽에서 보면 능선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바깥쪽에서 성벽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성문은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동북 모서리에서 발견된다. 현재 성벽이 끊겨 있다. 성벽이 끊긴 것은 최근에 성곽 내외를 연결하는 도로가 개설되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끊어진 것이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볼 때 원래부터 이곳에 성문이 있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벽은 이미 완전히 유실되어 성벽의 통과선조차 짐작하기 어렵지만 성내에서 가장 낮은 곳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곳에도 성문이 있은 것으로 보인다. 동문지의 반대쪽에 해당되는 서벽쪽에도 성문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건물지는 성내 전역에 걸쳐 있다. 성내 전역이 평탄면으로 되어 있는 만큼 많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성내에서는 어디에서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습된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점에서 이 토성의 축조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한다.
[의의와 평가]
금강에 접하고 있는 산성이며, 당시의 교통로인 수로를 통제할 목적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