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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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淸南道邑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경순 |
[정의]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등사본 형태로 편찬한 충청남도의 도지.
[개설]
『충청남도읍지』는 1906~1910년에 등사본 형태로 편찬된 충청남도 도지이다.
[형태/서지]
38개의 읍진지[36개 군의 37개 읍지와 1개 진지]를 등사하여 9책에 나누어 수록하였다. 지도도 등사하여 모두 흑백이다.
제3책에 전의지도(全義地圖), 전의아사도(全義衙舍圖), 전의현읍지(全義縣邑誌), 연기현지도(燕岐縣地圖), 연기읍지(燕岐邑誌), 목천현산천강역지총도(木川縣山川疆域之總圖), 목천현지(木川縣誌)가 수록되어 있다.
현재 규장각에는 본 책과 같이 등사되어 다른 한 질로 묶인[『충청남도읍지』〈奎 10769〉 ]가 소장되어 있다. 또 본 책과 짝이 되는 『충청북도 읍지』 2질도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당시 충청남도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충청남도와 경기도 평택시, 충청북도 청주시의 문의면 등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충청도는 54개 군현으로 이루어졌다. 흔히 좌도와 우도로 나누고 좌도에 17곳, 우도에 37곳이 속하였다.
1896년에 13도제로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이전의 충청우도 지역이 충청남도가 되었다. 충청남도의 도 관찰부는 공주군에 두었으며, 예하에 37개 군이 속하였다. 1901년에는 오천군(鰲川郡)을 신설하여 보령군 내의 예전 수영(水營) 터에 군청을 두고, 1906년에는 문의군이 충청북도로 이속되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평택군이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세종 지역인 전의와 연기는 대체로 고종조의 1860~187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본 책은 등사본이기 때문에 지도나 읍지 본문의 글자가 번져서 선명하지 않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충청남도 소속 지역의 고종 초반까지 읍지를 원본 그대로 충실하게 수집해서 등사하여 놓아 충청남도의 읍지 전통을 되살리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충청남도읍지』(1899) 속의 『전의군아사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전의현 관아의 구조와 배치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하여 동헌, 객사, 질청(作廳), 향청, 옥, 내아, 사창, 창고와 같은 건물들의 배치를 잘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관아의 기능을 탐구하면서 전의현의 행정조직을 연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헌은 현감의 집무소이고, 향청은 전의지역의 양반인 좌수와 별감들의 집무소이고, 질청은 이방을 비롯한 아전의 집무소인 점을 탐구할 수 있다. 지방 행정은 수령과 지방 양반, 향리들이 연합하여 통치한 행정조직임을 추론할 수 있다.
세종 지역의 고지도에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향교, 서원, 서당이 나타나 있다. 서민 교육기관인 서당은 『충청남도읍지』 속에 그려진 『전의군지도』에 뇌암서당이 전의현 박동에 유일하게 그려져 있다. 여기에 서원과 서당 구조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전의향교는 『전의군아사도』(1899)에 대성전, 명륜당, 전례청, 동·서재, 외삼문, 홍살문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의의와 평가]
『충청남도읍지』는 1906~1910년에 등사본 형태로 편찬되었다. 등사본이기 때문에 원본이 되는 도지가 있는지 여부를 추적해 보았으나 현재까지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수록된 읍지의 편찬 시기, 항목 구성 등이 다양한 것으로 보아 1870년대까지 편찬된 개별 읍지를 선별해서 등사하여 도지로 묶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1899년에 편찬한 『충청남도읍지』가 있음에도 예전에 편찬된 읍지를 선별 등사하여 도지로 엮었다. 그 이유는 탁지부에서 1907년 ‘제실(帝室) 및 국유 재산 정리’ 사업 진행과 관련하여 각종 공유지나 공적 시설에 관한 정보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는 예전 읍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이 책을 편찬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