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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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三問 |
영어공식명칭 | Seong Sammun |
이칭/별칭 | 매죽헌,근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경희 |
출생 시기/일시 | 1418년(세종 즉위) - 성삼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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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35년(세종 17) - 성삼문 생원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438년(세종 20) - 성삼문 식년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47년(세종 29) - 성삼문 문과중시 다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54년(단종 2) - 성삼문 집현전부제학이 됨| |
활동 시기/일시 | 1455년(세조 1) - 성삼문 예방승지가 됨 |
몰년 시기/일시 | 1456년(세조 2) - 성삼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91년(숙종 17) - 성삼문 신원됨 |
추모 시기/일시 | 1692년(숙종 18) - 성삼문 노은서원에 배향됨 |
추모 시기/일시 | 1692년(숙종 18) - 성삼문 충곡서원에 배향됨 |
추모 시기/일시 | 1758년(영조 34) - 성삼문 이조판서에 추증됨 |
추모 시기/일시 | 1791년(정조 15) - 성삼문 단종충신어정배식록에 오름 |
출생지 | 성삼문 출생지 -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
외가|처가 | 성삼문 외가 -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
사당|배향지 | 금남 문절사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330-5 |
사당|배향지 | 일지총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8 |
사당|배향지 | 노은서원 -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
사당|배향지 | 충곡서원 -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
사당|배향지 | 성삼문 사당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 한양촌 |
성격 | 문신|충신 |
성별 | 남 |
본관 | 창녕 |
대표 관직 | 집현전학사|홍문관수찬|직집현전|집현전부제학|예조참의|이조판서 |
[정의]
조선 전기 단종복위운동에 힘쓰다 죽은 사육신 중 한 명으로,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에 있는 문절사에 제향된 인물.
[개설]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이후 박팽년·허조 등과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다 실패하여 처형된 인물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충절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 달전리는 성삼문의 출생지도 아니고 생전에 머문 흔적이 있는 곳도 아니다. 그러나 달전리를 중심으로 성삼문의 후손들인 창녕성씨들이 세거하였다. 1902년(광무 6)에 문절사라는 사우를 세우고 영정을 봉안(奉安)하였다.
[가계]
성삼문은 본관(本貫)이 창녕(昌寧)으로 개성유후(開城留侯)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성달생(成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성승(成勝)이며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병자사화(丙子士禍) 때 성삼문을 비롯해 동생들과 아들들, 하다못해 갓난아이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여 혈손이 끊어졌다.
성삼문의 부인 연안김씨가 성삼문의 제사를 지냈으나 부인이 죽은 뒤 서울에 살던 외손에게 전하여 외손인 박호[박증의 동생]가 봉행(奉行)하여 왔다. 그러나 박호의 후손조차 끊어지면서 박증의 셋째 아들을 양자로 맞이하여 성삼문의 제사를 봉행(奉行)하였고 후에 난리 등으로 성삼문의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와 외손 내외의 신주(神主)를 인왕산에 묻었다. 1672년(현종 13) 신주(神主)가 발견되면서 송시열의 주관하에 홍성에 모셨다고 전한다.
[활동 사항]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홍주 적동[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세종 20)에는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으며 1447년(세종 29)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 직집현전으로 승진하였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등과 함께 도왔는데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유배 중인 명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 사신을 따라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 와 1446년(세종 28)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1454년(단종 2)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세조 1)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같은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하여 선위를 강요하자 성삼문은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하기도 하였다. 이후 아버지 성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 박팽년, 유응부(兪應孚), 허조(許慥), 권자신(權自愼), 이개, 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하여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1456년(세조 2)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날을 거사일로 정한 후 거사일 전날 집현전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 그리고 박쟁(朴崝)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윤사로(尹師路), 권남(權擥), 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가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또 김질(金礩)에게는 김질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가 중지되었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면서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며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 갔다. 이때 성삼문은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며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고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 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불에 달군 쇠로 성삼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 내게 하였으나 성삼문은 안색도 변하지 않으면서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아버지 성승, 이개, 하위지(河緯地), 박중림, 김문기(金文起), 유응부, 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처형당하였다. 형을 당한 뒤 성삼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祿)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家財)[한 집안의 재물이나 재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었다고 전한다.
[학문과 저술]
성삼문은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조정의 경연(經筵)[고려·조선시대에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일]과 문한(文翰)[문필에 관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저서로는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
[묘소]
병자사화 때 서울 새남터[현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 변 모래사장]에서 성삼문이 처형을 당하자 김시습(金時習)이 시신을 수습하여 한명회(韓明澮)의 압구정(鴨鷗亭)이 내려다보이는 노량진(露梁津)에 묻었다고 전해지지만, 언제 어떤 연유로 노량진에 무덤이 조영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성삼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일명 ‘일지총(一肢塚)’이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8번지에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뒷날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서 대의를 위하여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성삼문의 높은 절의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1680년(숙종 6) 분가하여 살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의 한양촌에 사당이 세워졌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冤)[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다.
1692년(숙종 18) 성삼문의 출생지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노은서원이 창건되어 사육신으로 배향(配享)되었으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1692년(숙종 18)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에 있는 충곡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으며 장릉(莊陵)[단종의 능] 충신단(忠臣壇), 영월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 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 등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