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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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閔後騫旌閭 |
이칭/별칭 | 효운,월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월하리 88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708년 - 효자 민후건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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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00년경 -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월하리 초입으로 이전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3년 - 효자 민후건 정려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효자 민후건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6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효자 민후건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6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효자 민후건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6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효자 민후건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월하리 887 |
원소재지 | 효자 민후건 정려 -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월하리 초입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여흥민씨 문중 |
관리자 | 여흥민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6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월하리에 있는 민후건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효자 민후건 정려는 민후건(閔後騫)[1571~1652]의 충효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708년(숙종 34)에 명정을 받아 건립되었다. 민후건은 여흥(驪興)[현 여주] 사람이다. 자는 효윤(孝胤), 호는 월하(月河)이다. 민후건은 대사헌 청백리 민휘(閔暉)의 5대손이며, 감사 민수천(閔壽千)[?~1530]의 현손이다.
아버지 민호(閔浩)[1550~1594]는 관직을 지내지 않았으나 아들 민후건이 정사원종공신에 책록되어 1625년(인조 3) 좌승지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는 일]되었다.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1550~1620]는 영의정으로 증직된 이순장(李順長)의 손녀이자 감찰을 지낸 이두(李㞳)의 딸로, 19살에 시집왔다. 민호와 연안이씨는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민후건과 민시건이다. 딸은 한준민과 혼인하였다. 연안이씨 역시 민호의 관작에 따라 1625년(인조 3) 숙부인에 증직되었다.
민후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6년(선조 39) 진사에 입격(入格)[시험에 뽑힘]하여 통훈대부 공조정랑까지 지냈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1625년(인조 3)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 되었고, 낙향 후 병자호란을 맞아 연기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등 적극적인 향촌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1708년(숙종 34)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에 증직되며 명정을 받게 되었다.
민후건이 26세가 되던 1596년에 모친인 연안이씨가 병이 났는데, 병세에 잉어가 좋다는 말을 듣고 엄동설한에 강에서 잉어를 구해서 봉양하여 병을 고쳤다는 효행이 전하여진다.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2.5㎞ 정도 떨어진 곳에 월하리 월동마을이 있다. 민후건 정려는 월동마을의 북쪽 구릉 중·하단부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현재 정려의 주변은 복숭아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변천]
민후건이 명정을 받게 된 계기와 과정은 뚜렷하지 않으나 그의 학문관계, 관력 및 행적, 후손들의 향촌활동 등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그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1646년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74~1656]이 민후건의 아버지 민호의 묘비명을 찬한 것으로도 반증되된다. 또한 낙향한 이후 병자호란 때 연기 지역에서 사돈 관계인 강화최씨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는 등 지역 내에서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민후건의 후손들도 연기 지역에서 혼인관계를 통해 사족집단과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스스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손자인 민종사(閔種泗)[1613~1672]는 연기향안(燕岐鄕案)에 등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효자로 칭송이 높았다. 또한 민종사의 부인은 창녕성씨이고, 당시 연기 지역 유력 성씨로서 충효로 증직되는 강화최씨 최조원(崔造源)의 네 아들(최유화, 최명화, 최주화, 최정화)과 사촌 간이다. 민종사의 차남인 민계선(閔繼先)의 처는 남양홍씨 집안이다.
이와 같이 학문적 연계, 개인적 관력, 활발한 지역 활동을 통하여 지역 내에서 지위를 구축한 민씨 집안이 지역의 유력 가문과 혼맥을 맺고 이들 가문의 협조를 받아 1708년에 명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민후건의 명정 사실은『호서읍지』, 『연기지』, 『조선환여승람』 등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정려기나 관련 자료가 없어 건립 과정, 중수 사실 등 연혁 파악에 어려움이 많다. 다만 후손의 제보에 따라 원래는 월하리 가래터에 위치하였으나 적어도 100년 이상 이전에 현재 위치로 이건되었다는 사실만 확인된다. 그 후 1983년에 개축 및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정면·측면 각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양 측면 박공 밑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에 푸른색 페인트가 칠해진 낮은 철책으로 보호하였으며, 출입문이 있다. 정려는 120㎝의 8각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올렸으며, 사면을 홍살 처리 없이 원주에 석가래를 연결하였다.
[현황]
정려 내부에는 명정현판이 걸려 있다. ‘孝子 贈嘉善大夫工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訓大夫工曺正郞 閔後騫之閭’라 하여 민후건이 공조정랑을 지냈고 공조참판에 증직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작은 글씨로 ‘崇禎紀元後再戊子七月日 命旌’이라 하여 1708년(숙종 34)에 명정을 받았음을 기록하였다. 현재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민후건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서 인조반정의 공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향한 효심이 지극해 효자로서 명정을 받은 지역 명망가였다. 비록 명정 과정이 담긴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행적과 학문적 관계, 혼맥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여러 유력 가문들의 협조 아래 정려 포장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