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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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朴履命旌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달전리 산119-3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946년 - 효자 박이명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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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4년 - 효자 박이명 정려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효자 박이명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17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효자 박이명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7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효자 박이명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17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효자 박이명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달전리 산 119-3 |
원소재지 | 효자 박이명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달전리 산 119-3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고령박씨 |
관리자 | 고령박씨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7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달전리에 있는 박이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개항기에 세운 정려.
[개설]
효자 박이명 정려는 박이명(朴履命)[1823~1890]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91년(고종 28)에 명정을 받아 건립되었다. 박이명은 본관이 고령이며, 자는 성지(性之)이다. 영성군 박문수(朴文秀)의 증손이며, 박승규(朴勝圭)의 아들이다.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이대장(李大將)의 딸이다. 박이명은 1857년(철종 8) 무과에 급제한 뒤 남포현감을 지낸 후에 이곳 전의로 입향하였다고 전해진다.
박이명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하여 시묘살이를 하였고,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사림에서 박이명의 효행 사실을 알리자 1891년(고종 28)에 정문을 내려 주었다. 남포현감을 지낸 뒤 남포에서 선정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남아 전해지며[충청남도 보령시 웅천면 대천리], 효자 박이명 정려의 뒤쪽에 있는 산에 박이명의 묘가 있다.
[위치]
전의면 소재지에서 691번 지방도로를 따라 6.5㎞ 정도 가면 전의면 달전리 윗다락골 마을이 나온다. 효자 박이명 정려는 윗다락골 안쪽으로 들어가 국사봉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의 동남향 사면 하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원래는 종가집의 대문에 정문으로 걸려 있었으나 박이명의 손자 박동빈(朴東彬)이 종가 건물이 퇴락하여 보존이 어렵게 되자 1946년 현 위치에 효자 박이명 정려를 건립하였다.
[형태]
손자 박동빈에 의해 1946년 현재의 모습인 정려각 형태로 건립되었고, 1994년 개축·보수되어 관리되고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화강석재의 원형 초석 위에 둥근기둥을 올렸다. 효자 박이명 정려의 3면은 시멘트로 막아서 마무리하였으며, 전면에만 홍살을 돌렸다. 창방 위에는 5개의 소로를 올려놓았으며, 양 측면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현황]
효자 박이명 정려 내부 중앙 상단부에는 효자 박이명에게 1891년에 명정하였음을 나타내는 가로 217㎝, 세로 21㎝ 크기의 현판[孝子 通政大夫行藍浦縣監 兼 洪州鎭管兵馬節制都尉 朴履命之門 上之卽位 二十九年 辛卯 十二月日 命旌]이 있다. 효자 박이명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효자 박이명 정려는 양친의 시묘살이를 모두 행하여 사후 1년 만에 박이명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개항기 전의 지역 고령박씨 후손들이 선조의 정려 건립을 위하여 노력한 활동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