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930
한자 孝子金忠烈旌閭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서정길 312[고등리 50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65년 이후연표보기 - 효자 김충열 정려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5년 - 효자 김충열 정려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7년 - 효자 김충열 정려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2001년 05월 31일연표보기 - 효자 김충열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19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효자 김충열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9호 지정
문화재 해지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효자 김충열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19호 지정 해지
현 소재지 효자 김충열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서정길 312[고등리 506]지도보기
원소재지 효자 김충열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서정길 312[고등리 506]
성격 정려
양식 겹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강릉김씨 문중
관리자 강릉김씨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9호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고등리에 있는 김충열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효자 김충열 정려는 1665년(현종 6)에 효자 명정을 받은 김충열(金忠烈)[1584~1668]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김충열은 본관이 강릉이며, 호는 왕호(王壺) 또는 운봉(雲峯)이다. 김충열전의현 입향조인 김승로(金承露)의 9대손이며, 김장생의 문하인 김해수(金海壽)의 손자이자 김산두(金山斗)의 아들이다. 10살 때 아버지 김산두가 병으로 고생하자 동생 김신열(金信烈)과 함께 지성으로 간호하였다고 한다. 이듬해에 아버지가 30살의 젊은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조모와 모친을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효성이 자자해서 현감이 김충열의 이름을 알고 환곡 때마다 효자 김충열이 왔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충열이 61세 되던 1644년에 모친상을 당하자 역시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다시 10년 후 김충열의 나이 70세가 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0년이 되던 날에 김충열은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喪禮)[죽은 사람에 대한 장사를 치르기 위하여 지켜야 하는 모든 예절]가 미진하였음을 애석히 여겨서 다시 상복을 입고 시묘살이를 시작하여 3년을 마쳤다. 김충열의 묘는 전의면 탑현리(塔峴里)에 있다.

[위치]

전의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691번 지방도로를 따라 1㎞ 정도 가면 갈정교가 나오고,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북서쪽으로 개설된 도로를 따라 약 2.5㎞ 가면 고등리에서 가장 큰 안골마을이 나온다. 효자 김충열 정려는 안골마을 동쪽의 낮은 구릉 남동향사면 하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김충열의 뛰어난 효행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조정에 그 사실을 알려 1665년(현종 6)에 살아서 효자 명정을 받았다. 1666년(현종 7)에 왕이 온양으로 행차할 때 대사헌 조복양(趙復陽)의 상언(上言)[왕조시대에 신하가 사사로운 일로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 또는 백성이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으로 음식물을 하사받고 2년 후인 1668년(현종 9)에 죽었다. 그 후 현종조에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讓衛副護軍)을 증직받았다. 정려가 건립된 것은 전하는 기록이 없어 살아서 명정을 받은 해에 건립된 것인지 김충열이 사망한 후 건립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정려는 1965년에 최종 중수되고 1997년에 새로 단청하였다.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화강석재를 이용한 8각 고주 초석을 세우고, 그 위로 둥근 기둥을 올렸다. 이익공 양식이며, 양 측면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4면에 홍살을 돌렸다. 현재 정려 주위에는 묘목이 심어져 있는 등 인근에 사는 후손들이 항상 잘 정비하고 있다.

[현황]

정려 내부에는 효자 김충열에게 명정을 한 현판[孝子 折衝將軍 行龍讓衛副護軍 金忠烈之閭, 91×31㎝]이 있다. 현판 아래에는 김충열의 효행을 기록한 비석[孝子 折衝將軍 行龍讓衛副護軍 金公旌門碑銘 竝書, 비신 46×118×18㎝, 비좌 82×57×13㎝]이 있다. 손자 김흥도(金興道)가 서(書)하고 류상운(柳尙運)[1636~1707]이 찬하였다. 연대는 ‘숭정기원후 신미’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김충열이 명정을 받은 연대가 1665년이고 찬한 류상운의 사망 연도가 1707년임에 비추어 볼 때, 1701년(신미년)으로 추정된다. 효자 김충열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효자 김충열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의 가장으로 늙은 조모와 모친을 정성으로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 부친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백발의 나이에 다시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행을 몸소 실천하였다. 효자 김충열 정려는 살아 있는 동안 효자 명정을 받은 드문 사례로, 조선 정표 정책의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