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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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漢陽趙氏旌閭 |
이칭/별칭 | 열녀 장이상 처 한양조씨 정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 292-2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888년 - 열녀 한양조씨 정문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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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2002년 - 열녀 한양조씨 정려 중건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열녀 한양조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23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열녀 한양조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3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열녀 한양조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23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열녀 한양조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 292-2 |
원소재지 | 열녀 한양조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 292-2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결성장씨 문중 |
관리자 | 결성장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3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에 있는 장이상의 처 한양조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개항기에 세운 정려.
[개설]
열녀 한양조씨 정려는 장이상(張彛相)[1816~1884]의 처 한양조씨(漢陽趙氏)[1812~1884]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한양조씨는 조우규(趙禹圭)의 딸로, 결성장씨 가문에 출가하였다. 남편 장이상은 판윤 장전(張詮)의 10세손이며, 1816년 장강제(張綱濟)와 순천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1882년 증광시에 합격하여 진사에 오른 인물이다.
1955년 성기운(成璣運)이 지은 ‘정려중건기’에 의하면 한양조씨는 시할머니가 치아가 없어 음식을 씹을 수 없어서 자신의 젖을 짜서 마시게 하였고, 시어머니가 전염병에 걸리자 꿩을 구하여 병을 고쳤으며, 시어머니가 또다시 병이 나자 우황을 구하여 병을 낫게 한 효부(孝婦)[지극한 정성과 봉사로 시부모를 잘 섬기는 며느리]였다.
한양조씨는 1884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이 병을 앓고 있음에도 약과 식음을 전폐하며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6일 만에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주위 사람들은 한양조씨를 ‘어진 미인’이라 하며 칭송하였다고 한다.
[위치]
연동면 소재지에서 504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500m 가면 도로 오른쪽으로 노송리 송룡마을이 나온다. 열녀 한양조씨 정려는 송룡마을에서 송담마을로 가는 소로를 따라 난 길의 구릉지 아래 왼편에 있다.
[변천]
효부이자 열녀인 한양조씨가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을 따라 죽은 후 근읍(近邑)[가까운 고을이나 읍]의 사족(士族)[문벌이 좋은 집안]들이 현감과 관찰사에게 고하고 다시 동부승지 조병익(趙秉翊)이 왕에게 상달(上達)[윗사람에게 말이나 글로 여쭈어 알려 드림]하여 1888년(고종 25)에 명정을 받았다.
이때 명정을 내리면서 나라에서 목재와 공장들을 내어 정문을 세우도록 하고 그 자손들의 연호(烟戶)[가족공동체를 중심으로 국가 영역 내의 백성을 편성한 행정 단위], 환자[還上, 조선 시대에 곡식을 사창(社倉)에 저장하였다가 백성들에게 봄에 꾸어 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던 일], 복호(復戶)[조선 시대에 충신, 효자, 군인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하여 주던 일] 등의 제반 잡역을 면제하도록 하는 예조입안이 내려졌다. 이 입안은 결성장씨 문중에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 정문 형태로 세워진 것을 나중에 후손들이 정려 형태로 고쳐 세우기 위하여 1955년 성기운에게 중건기문을 받았으나 정려를 세우지 못하였다. 그러다 2002년에 후손들이 정려를 중건하였다.
[형태]
현재의 열녀 한양조씨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다. 양 측면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화강석재를 가공하여 8각 고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다. 정려의 4면은 홍살로 처리하였고, 창방 위에는 2개의 화반대공을 놓았다.
열녀 한양조씨 정려는 축대를 높이 올려 만든 대지 위에 세워졌으며, 입구에 붉은색 주칠을 한 홍살문과 돌계단을 두었다. 열녀 한양조씨 정려 주변에는 기와를 얹은 돌담을 둘렀다. 크고 작은 수목들과 함께 조경이 잘 갖추어져 있다.
[현황]
열녀 한양조씨 정려에는 총 6기의 현판이 게재되어 있다. 정면 맨 앞에는 1888년에 명정을 받은 사실을 기록한 현판[孝烈婦成均館進士張彛相妻 孺人漢陽趙氏之門 光緖十四年戊子十月 日 命旌, 160×38㎝]이 걸려 있다.
명정현판 뒤로 1955년 한양조씨의 정문을 정려 형태로 고쳐 세우기 위하여 성기운이 찬한 ‘孝烈婦孺人趙氏旌閭閣重建記’[95×45㎝]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 12명의 지역 문인들이 한양조씨의 열행을 칭찬한 글을 모은 현판이 걸려 있다.
명정현판 왼쪽에는 증손인 장좌진(張佐鎭)이 지은 ’孝烈婦漢陽旌閭重建韻‘이 걸려 있고, 명정현판 맞은편에는 1992년 3월 장좌진의 집 대문에 현판을 걸면서 장좌진이 짓고 종손 장제식(張齊植)이 쓴 ‘旌閭重建改懸事由記’[95×45㎝]가 있다.
또한 명정현판 오른쪽에는 장좌진의 부탁으로 2002년 서하(西河) 임용순(任龍淳)이 지은 ’효열부유인한양조씨정려중건기‘가 있다. 임용순은 한양조씨의 열행을 칭찬하여 글을 쓴 12인 중의 한 명이다.
열녀 한양조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결성장씨 문중에 한양조씨의 명정 사실이 기재된 예조입안이 전해져 정려의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