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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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興里 |
이칭/별칭 | 여옷내,여웃내,온천리,방구동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상철 |
1946년 -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면 신흥리 개설 | |
1980년 -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면 신흥리에서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 신흥리로 개편 | |
2006년 -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 신흥리에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리로 개편 | |
행정구역 | 신흥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
성격 | 법정리 |
가구수 | 588가구 |
인구(남, 여) | 1,449명[남자 755명, 여자 694명]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신흥리는 남원읍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온천리라 하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지금의 이름으로 되었다.
[명칭 유래]
신흥리(新興里)는 새로 일어나는 마을이라는 데서 새로 붙인 이름이다. 신흥리의 옛 이름은 여옷내 또는 여웃내인데, 지형 형세가 마치 여우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온천리(溫川里)라 하였는데, 이는 마을 안에 샘이 없어 봉천수[빗물]를 주로 식수로 사용한 데서 뜨듯미지근 한 물을 먹는 마을이라 하여 온천리라 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초반에는 방구동 또는 신흥리라 하였다. 방구동은 마을의 지형이 거북이 형국으로 된 동산이 마치 산맥처럼 에워싸고 있다 하여 불리었다.
[형성 및 변천]
신흥리는 1416년(태종 16) 정의현이 설치될 때 정의현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300여 년 전에 여옷내 일대에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동네를 형성하였으며, 220여 년 전에는 방구령 일대에 동네를 이루었다고 한다. 1914년 제주군 서중면 신흥리가 되었으며, 1935년 4월 1일 서중면이 남원면으로 개칭되어 제주도 남원면 신흥리가 되었다. 1946년 제주도제가 실시될 때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면 신흥리가 되었다.
1948년 4·3 사건으로 여옷내마을[현 신흥2리]가 폐동되고, 방구령 일대의 해안 마을에 사람이 모여들며 더욱 커졌다. 1950년대 중반부터 방구령[방구동]과 보말개[보말동] 일대를 합쳐 신흥1리라 하고, 여옷내·석수동·고수동 일대를 신흥2리라 하였다.
1980년 남원면이 남원읍으로 승격되어 남원읍의 관할하에 있게 되었으며,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면서 남제주군이 서귀포시에 통합되어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 신흥1리의 방구동과 보말동이 있으며, 신흥2리의 고수동과 석수동이 있다.
[자연 환경]
신흥리는 동남쪽으로 흐르는 솔내[松川]를 경계로 표선면 토산리와 접하고 있다. 해안에서 중산간 지역에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해안변을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신흥1리는 서쪽으로는 태흥3리와, 북쪽으로는 신흥2리와 접하고 있으며, 신흥2리의 서쪽에는 의귀리와 접하고 있다. 신흥리 신흥 공동목장 앞에는 여절악[209m]이 있으며, 남쪽으로 크게 벌어진 말굽형 굼부리를 이루고 있다.
[현황]
신흥리는 과수원이 전체 면적의 49.1%를 차지하여 감귤 산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어업도 주요 소득원의 하나이다. 2011년 말 현재 신흥리의 인구는 588가구, 1,449명으로, 남자가 755명, 여자가 694명이다. 일주 도로가 통과하는 해안을 끼고 취락이 형성되어 있으며, 교통망이 잘 형성되어 있다.
주요 시설로는 마을회관·경로당·의원·보건진료소·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도서관이 있으며, 마을 단체로 신흥1리는 노인회·원로회·부녀회·청년회·영농회·작목반이 있고, 신흥2리에는 마을회·청년회·부녀회·노인회·동백고장보존연구회·신흥리연합청년회가 있다. 한편, 신흥리 1159-1번지에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7호인 신흥 동백나무 군락이 있으며, 지역 특산품으로는 감귤·키위·한우·흑한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