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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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永祿 |
영어공식명칭 | Choe Yeongrok |
이칭/별칭 | 유천(幼天),해암(海菴),노수(鷺睡),금옹(錦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793년 - 최영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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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21년 - 최영록 목사가 조정에 천거 |
활동 시기/일시 | 1842년 - 최영록 암행어사 김기찬이 조정에 천거 |
활동 시기/일시 | 1853년 - 최영록 사창서당 강장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856년 - 최영록 경상도관찰사 신석우가 조정에 천거 |
몰년 시기/일시 | 1871년 - 최영록 사망 |
출생지 | 최영록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 |
거주|이주지 | 최영록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 |
거주|이주지 | 최영록 이주지 - 경상북도 안동시 |
수학|강학지 | 최영록 수학지|강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 |
외가|처가 | 최영록 처가 - 경상북도 안동시 |
묘소|단소 | 최영록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영천 |
대표 관직|경력 | 사창서당 강장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유천(幼天), 호는 해암(海庵)·노수(鷺睡)·금옹(錦翁).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1560~1638]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무첨재(無忝齋) 최기중(崔器重)[1730~?]이며, 할아버지는 최지해(崔之海)이다. 아버지는 최성한(崔聲翰)이고, 어머니는 감찰(監察) 손회경(孫會慶)[1748~?]의 딸 경주 손씨(慶州孫氏)이다. 첫째 부인은 부림 홍씨(缶林洪氏) 홍석일(洪錫一)의 딸로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1620~1674]의 후손이며, 둘째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 박이익(朴履益)의 딸이다.
[활동 사항]
최영록(崔永祿)[1793~1871]은 1793년(정조 17)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비범하여, 보는 이들이 모두 귀하게 여겼다. 8세 때 냇가에서 놀기 위해 어머니에게 입을 옷을 청하여 푸른색 옷을 받자, 국상(國喪)[정조의 국상] 때는 푸른색 옷을 입을 수 없다고 말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도 하였다. 1805년(순조 5)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소리 내어 슬피 우는 것이 어른과 다르지 않았으나, 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 계셨기에 도에 지나치게 슬퍼하지는 않았다. 이후 같은 해 11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장례의 여러 절차를 예에 의거하여 행하였다. 할머니와 생가의 할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1814년(순조 14)에 흉년으로 경상도 일대에 기근이 심하자, 최영록은 사비를 내어 일가친척은 물론 고을의 백성들까지 구제하였다. 이에 1821년(순조 21)에 목사가 이러한 선행들을 이유로 그를 조정에 천거하기도 하였다.
1839년(헌종 5)에는 거주지를 바닷가로 옮기고 문미(門楣)에 ‘해암(海菴)’이라 쓰고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이때 자손들을 경계하며,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은 한가지 이치이다. 옛사람이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하였으니, 전날의 부귀가 이미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오늘날의 빈천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하늘에 달려 있는 빈천을 근심하지 말고, 각자 자신에게 달려 있는 도를 닦아야 한다. 그리하면 다른 날에 어찌 훌륭한 인물이 될 이치가 없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후 1842년(헌종 8)에 암행어사 수의(繡衣) 김기찬(金器贊)으로부터 “실지(實地)로 행하고 학문이 돈독하여, 고을의 선비들이 삼가 본받을 만한 자이다.”라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1856년(철종 7)에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순상(巡相) 신석우(申錫愚)가 낙육재(樂育齋)에서 선비들을 모아 강학회를 열며 강장(講長)으로 초빙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신석우는 최영록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또한 1857년(철종 8)에는 암행어사 서상지(徐尙之)가 편지를 써서 안부 인사를 전한 뒤 쌀과 고기를 보내 주었다. 이에 최영록은 “쌀과 고기를 보내 주신 것은 늙은이를 우대하는 예에서 나온 것이로되, 제 나이가 아직 70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의리상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라 하며 사양하였다. 이후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와 함께 고을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1871년(고종 8)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영록은 일찍 어버이를 여의어 배울 시기를 놓쳤기에 남들보다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였다. 16세에 이르러서야 『대학(大學)』을 읽기 시작했는데, 낮에는 독서하고 밤에는 사색하기를 반복하면서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방법을 두루 체험했고, 책을 두세 번 읽고 나서는 견문과 학식이 점점 환해져 향해야 할 곳이 이미 바르게 되었다. 일찍이 집 뒤에 작은 서재를 짓고 두 아우와 함께 생활하며 학업을 닦았으니, 『중용(中庸)』, 『대학(大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습하고 질의하는 데 온 힘을 쏟으면서 하루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1844년(헌종 10)에는 해인사(海印寺)에서 독서하던 중에, 호남(湖南)에서 온 객(客)과 수일 동안 함께 유람을 하게 되었다. 당시 최영록은 객이 관상을 봐주겠다고 하자 사양하면서 “관상가는 미래에 일어날 길흉(吉凶)을 판별하는 자이다. 내 나이가 이미 50세인지라, 비록 죽어도 요절했다고 말할 수 없거늘, 분수 밖의 바라는 바가 없으니 관상을 볼 필요가 있겠는가.”라 말하였다. 그리고 객이 떠나간 뒤에 「점심자(占心字)」 절구 한 수를 지었다. 같은 해 가을에는 오암서원(鰲巖書院)에 머물면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논하였다.
이후 1853년(철종 4)에는 사창서당(社倉書堂)의 강장(講長)이 되어 옛 제도의 회복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또한 회연서원(檜淵書院)에 강회(講會)를 설치하였는데, 이웃 고을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회연서원과 청천서원(晴川書院)의 학도들을 위해 학계(學契)를 마련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858년(철종 9)에는 청천서원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었는데, 절하고 읍하며 나아가고 물러남을 한결같이 『의례(儀禮)』에 의거하면서 70세의 나이에도 조금도 게으른 모습이 없었으니, 자리에 모인 선비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문집으로 『해암선생문집(海菴先生文集)』 6권 3책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일명 청파방(靑坡坊)]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족종제(族從弟)인 최영준(崔永駿)이 행록(行錄)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