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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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千欽 |
영어공식명칭 | Song Cheonheum |
이칭/별칭 | 치만(致萬),용가(勇加),소석(小石),무출(武出),송인건(宋寅建),송장군(宋將軍)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4월 8일 - 송천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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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송천흠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0일 - 송천흠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선고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송천흠 중국 망명을 시도하다 붙잡힘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8월 - 송천흠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결석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2월 - 송천흠 일본으로 밀항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송천흠 상화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3월 - 송천흠 의열단원 김지섭의 이중교 폭탄 의거 지원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송천흠 규슈 한인 노임 체급 쟁의 대표로 선출 |
몰년 시기/일시 | 1968년 6월 11일 - 송천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송천흠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송천흠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66년 4월 22일 - 송천흠 추모 묘비 의사야성송공지묘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2021년 11월 21일 - 송천흠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 |
출생지 | 송천흠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
거주|이주지 | 송천흠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
학교|수학지 | 송천흠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
활동지 | 송천흠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
활동지 | 송천흠 활동지 - 일본 |
묘소 | 국립 대전 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다짐했고, 1919년 유림단의 독립 청원 운동과 3.1 운동의 후원에 참여하였다. 1920년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과 연락하고 만주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었고, 국내로 압송되던 중에 도주하여 1920년 8월에 열린 결석 재판에서 무기 징역이 선고되었다. 1920년 12월 일본으로 밀항하여 항일 투쟁을 벌였다.
[가계]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치만(致萬), 호는 용가(勇加) 또는 소석(小石). 아명은 무출(武出)이고, 이명으로 송인건(宋寅建)을 사용했으며, 세칭 송장군(宋將軍)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송심권(宋心權)이다.
[활동 사항]
송천흠(宋千欽)[1888~1951]은 1888년 4월 8일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인 1894년에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의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수학했으나, 가정이 빈곤하여 그만두고 주경야독(晝耕夜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소식에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매국적(賣國賊)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면 내 주먹으로 죽이겠다.”고 부르짖으며 항일 투쟁을 결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에 비분강개하여, 이후로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 규합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유림단의 독립 청원 운동에 참여하여 후원했고, 3월 29일 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서 송준필이 제작한 「국내 통고문(國內通告文)」을 각처로 배포하였다. 1919년 4월 2일에는 사전 준비한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당황한 일본의 경찰, 헌병 분견대 군인, 대구에서 파견된 군 수비대가 주동 인물들인 장석영(張錫英)·송규선(宋圭善)·송준필·이봉희(李鳳熙)·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우선(宋祐善)·송문근(宋文根)·송회근(宋晦根)·송훈익(宋勳翼) 등을 체포하였다.
격분한 송천흠은 시위 군중을 이끌고 경찰서를 습격하는 한편, 경찰서 정문으로 나아가 일제 경찰을 질책하며 “대한 사람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는데 왜 체포하느냐.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일제 경찰의 제지를 무릅쓰고 경찰서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에서는 사망자 2명을 포함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경에 체포된 송천흠은 상처 치료를 조건으로 배성찬(裵聖贊) 등 수명의 신원 보증 아래 가석방되어 일경과 헌병 각 1명의 감시를 받으며 대구 자혜병원(慈惠病院)으로 실려 갔다. 그러나 병원 의사가 일본인이라서 적의 손에 치료받을 수 없다고 호통치며 의료 기구를 파괴하고 즉시 퇴원했고, 가료 기간을 1주 연장하여 일경의 감시 아래 향리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1919년 4월 17일에 강제 연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이튿날 출두하기로 약속한 뒤, 그날 밤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피신 이유는 자신이 구속되면 사건이 확대될 것이라는 옥중 동지들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결석 재판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1920년 향리에서 은신하던 중 만주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 김좌진과 연락하여 독립군에 합류하기로 결심하고, 함께 만세 시위 운동을 했던 동향인 이병철(李柄喆)의 도움으로 모집한 군자금 700원을 가지고 신의주로 갔다. 선편으로 압록강을 건너려다가 검거되어 신의주경찰서에서 군자금을 압수당하고 3일간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이어 서울로 압송되던 중 신의주역에서 포박을 절단하고 호송하던 일경 3명을 강타하여 쓰러뜨린 뒤 피신하였다. 살인 미수 및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1920년 8월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결석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송천흠은 중국으로 망명하려다 단념하고 남하하여 전라북도 무주(茂朱)에서 의열단원 이국필(李國弼)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0년 12월 이국필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밀항하여 후쿠오카현[福岡縣] 와카마츠시[若松市]를 근거지로 하여 항일 투쟁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비밀 결사 상화회(相和會)를 결성하여 활동했고, 상화회는 규슈[九州] 지방 각처에 지부를 두었다. 1923년 9월 1일 관동 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조선인 대학살 사건(朝鮮人大虐殺事件)이 벌어지자 후쿠오카현을 중심으로 조선인 교민을 규합하여 연명 항의서(連名抗議書)를 일본 요로에 제출하였다. 또한 상화회 각 지부가 수집한 구호품을 조선인 이재민들에게 송부하였다.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이 1924년 1월 5일에 감행했던 도쿄[東京] 왕궁 앞 니주바시[二重橋] 폭탄 의거를 위해 상하이[上海]에서 야하타항[八幡港]에 들어오자, 거처를 마련하고 의거에 사용할 폭탄을 은닉해주며 도쿄로 가는 김지섭을 도왔다. 1924년 3월 규슈에서 한인 노임 체급 쟁의(韓人勞賃滯給爭議)의 대표로 선출되어 담판을 벌이다가 일본인 수십 명과 충돌하며 격투를 벌였다. 1925년에는 기후현[岐阜縣] 철도 공사장의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대우에 분격, 동포 노동자를 대표하여 항의하다가 일본인 20여 명과 충돌하여 왼쪽 눈까지 실명하며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쿄토[京都]로 피신하였다.
1928년에는 11월에 즉위식을 거행하는 쇼와[昭和] 일왕을 암살하기 위해 의열단원 이국필 등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던 중 예비 검속을 당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1942년까지 여러 차례 예비 검속을 당하였다. 1945년 58세의 나이로 왼쪽 눈을 실명하고 입이 찢어지는 등 병든 노구를 이끌고 귀향했고, 1951년 10월 8일 뇌일혈(腦溢血)로 사망하였다. 향년 64세였다.
[묘소]
2021년 11월 21일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66년 4월 22일 묘비 ‘의사야성송공지묘(義士冶城宋公之墓)’[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찬(讚)]를 세우고, 재사 모의각(慕義閣)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용가 송천흠 의사 추모의 노래」[박종화 작사, 김성태 작곡]가 헌정되었다.